44개월에 압축된 평생 사랑
지난주 오빠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청양고추를 먹고 배탈이 온 나는 누워있었고 오빠는 그 배탈을 한방에 낫게 해 줄 영상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교회에서 하는 여름성경학교에 참여한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 조카가 120명 앞에서 아이돌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오빠말대로 배탈을 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너무 잘해서.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난 건지 신기하면서도 당당함과 자신감이 부러웠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숫기도 없고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지라 어린 시절에 앞에 나가서 하는 자기소개든 춤이든 노래든 장기자랑이란 걸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도 낯이 익고 편한 사이가 되면 활발해지는 편이긴 하지만 조카만큼 다수 앞에서 춤을 출 정도의 인싸력은 엄두도 못 내는 성격이다. 오빠도 나와 비슷하다. 숫기가 없고 나서는 것을 절대 못하는 우리는 조카의 모습이 너무도 신기했다. “외갓집을 닮았나 보다.” 라며 감탄에 감탄을 했다. 엄마는 그런 조카의 모습을 보고 "저 당당함과 자신감은 너를 닮았는 데 아빠가 있었더라면 너도 저랬을 거야. "라고 했다. 의외였다. 내가 아는 나와 엄마가 생각하는 나 사이에 이 괴리. 그렇다. 엄마는 아빠가 나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며 오빠는 매일 혼내고 나는 물고 빨고 했다며 얼마나 사랑을 줬는지 모른다고 했고 나도 아빠가 있었더라면 당당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으로 컸을 거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나는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아빠의 빈자리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덜어낼 수 있었다. 삼십 년이 넘은 아빠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은 이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기도 했고 내 마음이 자라기도 했다. 아빠 빈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지금의 내 모습에 대체로 만족할 수 있게 된 것은 9년째 한결같은 지지와 애정을 주는 남편 덕분이다.
‘아빠가 있다면 어땠을까?’
내가 평생 떠안고 살아야 하는 질문인 것처럼 아빠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모조리 털어낼 수는 없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아쉬움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10대, 20대 때는 나의 모든 결핍을 아빠의 빈자리 탓을 하며 지내는 게 일상이었다. 그때도 충분히 좋았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아빠의 부재에 발목이 잡혀 충분히 아니 넘치도록 불행했다.
작년 봄 할머니는 아빠를 만나러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할머니는 30년 넘도록 먼저 떠난 큰아들을 천국에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사셨다. 그런 할머니를 알기에 우리 곁을 떠난 게 슬프기도 했지만 할머니의 평생 그리움과 아픔, 슬픔 그 자체였던 아빠를 만났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두 분이 꼭 만나 그동안 못했던 대화도 많이 나누었으리라. 아직도 나누고 계시리라 믿는다.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고모들과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금의 나보다 젊고 예뻤던 고모들이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있는 모습에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고모는 열일곱 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이후 장남이었던 아빠가 작은 고모의 아빠였다고 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당시 작은 고모는 우리 남매와 함께 아빠를 또 잃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큰 고모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아빠가 가장으로서 아주 큰 역할을 했다며 고모들을 통해 아빠의 학창 시절과 20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아빠만 좋아해서 작은 아빠가 힘들었단 이야기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할머니에게 아빠는 큰아들이자 남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할머니는 삼십 년이 넘도록 아빠를 단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걸까. 우리 남매가 커서 20대가 되었을 때에도 만날 때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안쓰러움과 기특함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지 않았을까 싶다. 장례식장에 있던 친척들과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면 반 이상 등장하는 아빠이야기. 그때 알았다.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아빠와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 듣다 보니 희미하기만 했던 아빠의 모습에 대충이라도 윤곽선을 그릴 수 있었다.
큰고모와 작은 고모도 엄마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작은 고모가 물었다.
“아빠가 너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너는 모르지? “
“나? 기억 안 나지. 아빠 얼굴은 사진 보고 알고 목소리는 작은 아빠랑 비슷하다기에 작은 아빠 목소리 듣고 상상하지. “
“으이그. 진짜 어렸지. 그때 네가 다섯 살이었나. “
“맞아. 다섯 살.”
옆에 있던 큰고모가 말했다.
“네 아빠가 너 낳고 춤췄잖아. 자기 딸 낳았다고. “
“정말?”
“어! 그리고 네가 쪼끄매 가지고 훌라후프를 되게 잘했어. 그걸 어찌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몰라. 느 아빠도 요즘말로 하면 딸바보 중에 바보왕이었어. 네가 이렇게 큰 거 보면 아빠가 얼마나 좋아할까. “
그렇게 전해 들은, 내가 아빠에게 받았던 사랑 이야기에 텅 빈 마음속 무언가가 쑤욱 차올랐다.
‘나 진짜 아빠한테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였구나.‘
고모들의 이야기만 들어도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느껴졌다. 뻥 뚫렸던 어린 시절의 결핍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시절 참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내 안에 쌓여 있던 아빠의 사랑을 이제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내가 태어난 지 백일 되던 날, 아빠는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만난 지 백일만에 정해진 우리의 이별. 아빠는 어린 우리 남매를 엄마에게만 맡겨두고 떠날 수 없어 죽을힘을 다해 병마와 싸웠다고 한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이 아이들이 온전히 클 때까지 못 지켜줄 수도 있다는 좌절.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들로서 사위로서 오빠로서 형으로서 매형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던 전성기 마흔. 처음 맞닥뜨리는 죽음과 남겨두고 떠나야 할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별이 너무나도 무서웠을 아빠. 아빠가 떠난 마흔을 몇 년 앞둔 지금에서야 조금이나마 아빠를 이해할 수 있다. 얼마나 착잡했을지. 그래도 아빠는 빛나는 삶을 살다 떠났다. 아빠를 아는 모든 이들이 아직도 그리워하고 기억해 산소를 찾아온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오빠와 내가 꽂은 꽃이 아닐 때 알 수 있다. 다른 분이 다녀가셨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도 아빠를 그리워한다는 것을.
나는 아빠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아니었다. 아빠는 4년 동안 평생 줄 사랑을 압축해서 주고 떠났던 것이었다. 밀도 높은 사랑을 받은 나는 특별했을 뿐 부족한 게 아니었다.
이제는 안다.
아빠의 부재가 나의 결핍을 만든 것이 아님을.
아빠가 있었더라면 나도 조카처럼 했을 거라는 엄마의 말은 맞는 듯하다.
든든한 지원군인 아빠가 있었더라면,
백여 명 앞에서 궁둥이를 흔들 용기가 생겼을 수도.
이미지 출처: 제주스톡064 네이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