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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Aug 04. 2024

남사친 논쟁의 종결판

위트가 가지는 힘

나에겐 오래된 친구가 한 명 있다. 재수할 때 만난 친구인데 당시에는 친하다기보다는 유치한 나의 장난을 너그럽게 받아준 친구였다. 우리는 스무 살 청춘에 남들이 대학교 엠티를 오는 가평에서 재수를 했다. 그 친구는 나름 착실히 공부를 하는 친구였고 나는 스무 살의 에너지를 못 이겨 교실보다는 노는 곳에 항상 가 있었다. 그랬던 우리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17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역시 인연이라는 건 가늘고 긴 게 최고인가.


우리는 다른 대학에 갔고 나는 새로운 학교 동기들과 있을 때마다 재수학원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곤 했다. 방을 같이 썼던 친구들은 수업 중이었거나 학교 활동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매번 당구를 치거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전화를 받아주었다. 친구와 별것 아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 힘들었던 일상에서 그때만큼은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을 지냈고 그 친구는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간다는 말만 하고 편지한 통 전화 한 통 없던 놈이 휴가만 나오면 학교 앞으로 찾아와 점심을 같이 먹어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레바논으로 파병을 간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가는 이유는 군인으로서의 사명감이나 애국심 따위는 1도 없었고 내무반 선임이 너무 괴롭혀서 도망을 가는 거라고 했다. 탈모증세가 심하게 왔을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기특하게도 자기 살길을 찾아서 레바논까지 가다니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친구는 파병으로 벌어온 돈으로 모근이식술을 받았고 엄청 스트레스받던 탈모는 나은 듯했다. 탈모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는 서로의 연애 이야기, 가족 이야기, 학교 이야기, 썸 타는 이야기, 점점 못하는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내가 이 친구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던 건 판단하지 않고 편견 없이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무거운 고민을 나 혼자 떠안고 끙끙 앓다가 그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순식간에 깃털처럼 가벼워져 날아가 버리곤 했다. 정말 그랬다. 마법처럼.


20대 초중반 내내 우울증이 심했던 나는 어느 날 과제를 하다 말고 친구에게 문자를 했다.


‘아 씨 자살하고 싶다.’


친구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피융핑핑핑. 게임소리가 들렸다.


“야 아직 죽으면 안 돼. 나 니 장례식장에 입고 갈 정장이 없어. 그래서 아직은 안돼.”


내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장례식에 입고 갈 자기 정장이 없어서라니. 나는 빵 터지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힘들 때마다, 자살충동이 일 때마다 그때가 떠오른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고비가 찾아왔을 때마다 그 친구의 목소리로 버텨왔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때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처럼 무섭게 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했거나 쟤 또 이상한 소리 한다고 했다면 지금 나는 다른 모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정하지 못했던 나에게 계속해서 위기가 찾아왔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친구를 만나거나 친구와 전화를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위안이 되었다. 우울한 나를 멀리할 법도 한데, 항상 유머러스하게 나의 우울을 털어버려 주는 유쾌한 친구였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에도 없는 용돈과 시간을 쪼개가며 만났다. 힘든 일상에서 숨통이 트이는 그런 친구였기에 그랬다. 바람 쐬기에 좋은 청계천에 앉아 하루종일 수다를 떨기도 하고 용돈을 받은 날엔 맛있는 걸 서로 사주기도 했다. 연애하는 거 아니냐고? 아니. 우리는 절대적인 우정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점이 1도 없기에 가능했다.   


어느 날 나는 좋아하는 선배에게 고백을 했고 바로 그 자리에서 차였다. 숨고 싶은 정도로 창피했지만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듣자마자 큰 소리로 비웃었다. 이상하게도 진지한 위로 보다 친구의 비웃음이 더 위로가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짝사랑하던 여자에게 고백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길래 친구를 격려를 하며 용기를 북돋아줬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단칼에 차이고 온 친구에게 나또한 진지한 위로 대신 큰 읏음을 선사했고 우리는 그렇게 실연의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서로를 스스럼없이 대했기 때문에 편했고 여자친구처럼 예민하지 않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기에 만날 수록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나는 10대 20대 여자친구들과 우정을 쌓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심기를 건드리거나 무심결에 한 한마디가 오해를 낳고 어느 날부터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대답도 안 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그녀들이 무서웠다. 그런 그녀들과 신뢰를 쌓기에, 우정을 쌓기에 내가 너무도 나약했고 단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복이 없는  이 친구가 더 편했는지 모른다. 지레짐작만 할 뿐 동성친구보다 이성친구가 대하기 편했던 이유에 대해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 사이를 이상하다, 남사친 여사친이 어디 있냐고 그랬지만 우리의 서사를 모르니까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 귀담아듣지 않았다. 나에겐 벼랑 끝에서 내 손을 잡아준 소중한 친구였다.


나는 방송국 막내작가로 그 친구보다 먼저 취준생 딱지를 먼저 뗐다. 하루하루가 정신이 없었고 우리는 연락이 뜸해졌다. 원래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라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고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알렸고 친구는 놀랐다.


“지금 결혼을 한다고?”

“응! “

“너무 어리지 않냐?”

“그래도 딱 느낌이 왔어. 이 사람이다.”

“그런 느낌이 오는구나. 신기하다. 축하한다.”


우리는 오랜만에 홍대에서 만나 식사를 했고 내 결혼식에 와주었다. 그 친구는 아직 취준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돈으로 축의를 했다. 나는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 친구가 대기업 취업소식을 카톡 프로필로 알게 되었고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야. 샘송맨 된 거야? 너무 축하해! 잘됐다!!!!”

“ㅋㅋ고맙다”

“야 근데 되자마자 알렸어야지 서운하다?”

“유부녀한테 먼저 연락하기는 그렇지.”

“아 유부녀는 뭐 친구 없냐 어이없네. 애 좀 크면 한번 만나자 샘송맨이 사주는 밥 먹어봐야지.”

“그래 알았다 아기 잘 키우고 너도 잘 지내고 있어라”


가늘고 긴 인연의 짧고 굵은 연락. 내 기억으로 그때 아이가 기어 다닐 때였는데 몇 년 뒤가 되어서야 만났다. 결혼식 이후 처음 보게 되었다. 너무 반가웠고 우리는 어딘가 모르게 늙어 있었다. 친구를 보자마자 마음만은 스무 살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아직 미혼인 데다 만나는 친구도 없던 친구는 나의 결혼생활을 궁금해했고 전업주부인 나는 대기업 샘송생활이 궁금했다.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그동안의 묵은 이야기를 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래서 친구가 좋은 건가. 철딱서니 없던 스무 살의 우리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있는 것,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우리가 각자 승용차를 타고 왔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몇 년 만에 본 우리는 어제 만난 것처럼 여전히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댁이야기, 회사이야기, 연애이야기...


친구는 작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와주었다. 결혼 준비로 바쁠 때였을 텐데도 장례식장 앞까지 와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


드디어 친구가 장가가는 날. 축의금 봉투에 두둑이 담아 식장으로 향했다. 아직도 장례식에 입고 갈 정장이 없어 죽으면 안 된다고 했던 그날의 빚을 갚으려면 멀었지만 첫 발을 뗀 것 같아 신났다. 앞으로도 그날의 빚을 갚아 나갈 생각이다. 지금도 가끔 카톡으로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곤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선명해지는 그날의 고마움이 힘들 때마다 마음을 따듯하게 한다.


우리는 각자 가정을 꾸렸고 인간 대 인간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의 인생을 응원한다.


고맙다. 이 자식아.


이미지 출처: 제주스톡064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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