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끝나갈 때쯤 되면 부심은 추가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들어 올린다.
이기고 있는 팀에게는 긴 시간이지만 지고 있거나 양 팀이 비기고 있다면 더없이 절실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어려서는 듣도 보도 못하고 젊어서는 관심 없던 고령 사회, 막상 그 앞에 다다르니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경기를 비기고 있거나 아쉬움이 남았다는 증거다. 행여 주어진 시간이 지루하고 길게 여겨진다면 의미 없게 살아왔거나 별다른 목표나 도전 의식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늘어난 수명이 단지 더 버텨야 할 지겨운 잉여의 시간일 뿐이다.
인생에는 세 가지 불운이 있다고 한다.
첫째가 초년의 성공이요
둘째가 중년의 상처 그리고
마지막이 노년의 빈곤이다.
축구로 치면 초년은 전반전이요 노년은 후반전인 셈이다. 초년의 성공이 불행한 이유는 그것을 끝까지 지켜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 만난 금 수저이거나 일찌감치 일이 잘 풀려 성공을 이루고 나면 자칫 교만해지거나 일을 그르쳐 실수하기 쉽고 그러면 재기가 어렵다는 뜻일 게다. 중년의 상처는 배우자를 잃는 사별을 의미하나 요즘은 이혼율이 높고 독신이 많아 딱히 불행으로 몰아가기는 좀 그렇다.
우리의 관심은 노년의 빈곤이다. 하도 들어서 참담하지도 않은 소리지만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자살률과 함께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빈곤은 경제적 이유 말고도 인간관계, 취미 생활, 자기 계발 등 사회 전방위에 걸친 적극성을 말한다. 따라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 후 은퇴하고 생활할 수 있는 만큼의 연금 수혜자라 하더라도 딱히 할 일이 없거나 만날 사람이 적어도 빈곤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직이든 창업이든 변화를 향한 욕망은 크지만, 막상 생각한 만큼 미리 필요한 준비를 다 마치고 그다음 단계로 옮겨 가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은퇴하면 뭘 할까?
일하기 싫을 때, 한가할 때,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족히 수 십 번은 더 묻고 또 해 본 생각이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한 지금 딱히 몰입할 일이 없다. 주위에서는 평생을 기획 업무만 하던 사람이 자기 계획도 없냐는 핀잔에서부터 아직 은퇴한 지 얼마 안 되니 좀 더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라는 위로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가 불편하다.
해서 서가에 꽃인 책으로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할 일이 머리를 스친다.
젊어서 업무상 해외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술도 좋아하지 않고 관광 다니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 고작 찾아다니는 게 서점이다. 의례 커피점이 매장 안에 있어 시간 보내기는 십상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이니 직구니 해서 외국 신간을 바로바로 구할 수 있지만, 그때는 시차가 있었다. 심한 경우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어떤 책은 2~3년씩 늦게 나오곤 했다. 해서 한두 권이라도 읽어 두면 꽤 앞서가는 사람대접을 받던 시절이다.
그래서일까?
아무튼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업무상 필요한 책은 경비 처리도 되고 또 회사에 가서 읽거나 비치해서 직원들과 공유도 할 수 있으니 좋다. 하지만 심리, 종교, 뉴에이지, 여행, 역사, 우주 과학 같은 책들은 사비로 사야 했고 사도 미처 읽을 시간이 없어 이 담에 봐야지 하면서 방치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이담이 된 셈이다. 신기한 건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책들이 지금은 흥미를 끈다. 무료해서 일까? 더 재미있는 건 인문 사회나 자연 과학, 예술 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글들 사이에 연관성이 보이고 앞뒤로 아귀가 맞아간다는 점이다. 나만의 착각일 수도, 짧은 공부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뭐 논문을 써서 발표할 것도, 책을 내자는 것도 아니고’하면서 개의치 않는다. 그러니 더더욱 편하고 재미있다.
친구 하나는 오다가다 사 모은 피겨 조립에 푹 빠져 있고 또 다른 지인 한 명은 볼 때마다 새로운 요리를 앞에 내민다. 한식, 서양식, 중식 해가며 벌써 자격증도 몇 개 땄다. 예측해 보건대 집에 있을 땐 거의 주방에서 살지 싶다. 지난 주말에는 인사동에서 그림 전시회를 하는 친구 모임에 다녀왔다. 핑계 김에 오래된 동창들의 얼굴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어쩌면 은퇴 준비는 겉으로 드러나게 해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가슴속 어딘가 에서 놓치고 세상에서 지나쳐 버린 아쉬움이 나도 모르게 되살아나듯 부활하는 그곳에 내 은퇴의 할 일이 숨어 있는 듯싶다. 거기서 은퇴의 보람(?)을 찾는다면 너무 한심한 철부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