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줄 수 없는 슬픔 앞에서

이정훈의 『위로는 서툴수록 좋다』로 살펴본 교실 속 서툰 위로

by 차미레
모든 위로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돌봄이 시작된다.
서툴지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교실로 향한다.



오늘 읽은 책 속 문장은 내게 오래 머물렀다.

“누구나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 서다가, 지나쳐 버리는 순간이 있다.”


이정훈 작가는 그것을 ‘연민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라 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을 끝까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국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교사로 살아가며 그 문장 앞에 자주 멈춘다.

아이의 눈물이, 동료의 한숨이, 학부모의 호소가 나에게로 흘러올 때마다

그 슬픔을 온전히 끌어안고 싶지만

어느 순간 나는 버겁고 지쳐서, 결국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때의 무력감이야말로 ‘연민의 한계’ 아닐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한계가 곧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은 냉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에서 진심을 다한다는 뜻이다.

교사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모든 아이의 상처를 다 치유할 수는 없지만

고통의 자리를 함께 바라봐주는 용기는 낼 수 있다.

그 용기가 곧 교육의 시작이다.


작가는 말한다.

정리는 일종의 돌봄이라고.

물건을 돌보고, 공간을 돌보고,

결국 자신을 돌보는 행위라고.


교사에게 정리는 단순히 책상 위 서류를 정돈하는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감정으로 뒤섞인 하루를 한켠에 놓고

내 마음의 자리를 다시 닦아내는 일이다.


정리라는 행위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나를 회복시키는 조용한 저항이다.

정리의 본질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라 ‘정돈’에 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교사이고 싶은지를 다시 묻게 된다.


정리는 결국 거리 두기의 기술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그 안에 잠식되지 않는 법.

그 거리 안에서 나를 지키고

그래야 내일 또 누군가를 바라볼 힘을 얻는다.


돌봄의 관계는 가까움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 위에서 유지되는 균형과 존중의 예술이다.


‘안아줄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은 덜 아프게,

조금은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


위로는 서툴지만, 그 서툼 속에서 인간은 계속 배운다.

완벽한 위로보다는

서툴지만 진심인 손길이 결국 사람을 살린다.


오늘도 교실 한켠을 정리하며 생각한다.

“이 아이들의 세상과 나 사이에는

어떤 거리를 두어야 서로가 무너지지 않을까.”

그 질문은 나를 더 좋은 교사로 만들기 위한

가장 솔직한 자기 점검이기도 하다.


정리는 끝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내기 위한 마음의 준비다.

돌봄과 서툰 위로의 이름으로, 나는 오늘도 하루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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