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비욘 나티코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가 전하는 가장 큰 자유

by 차미레
확신이 흔들릴 때, 배움은 다시 시작된다.


“나는 틀릴 수도 있다.”

이 짧은 문장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대신, ‘모를 수도 있다’는 여백을 인정하는 태도.

그곳에서부터 진짜 앎이, 그리고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는

완벽한 해답보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은 다르고, 마음은 흔들린다.

그럼에도 그는 고요하게 말한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않을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흘러든다.”


이 문장은 ‘옳음’의 시대에 건네는 가장 단단한 자유다.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배우고, 이해하고, 연결된다.


인식론은 ‘무엇을, 어떻게 아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한계가 존재한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 그 자체를 알 수 없고,

오직 ‘현상’을 통해서만 접근한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가 아는 것은 진실의 그림자,

혹은 우리 시선이 비춘 한 조각의 세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틀림은 실패가 아니라, 인간 인식의 본질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말은 무지의 고백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려는 열린 태도의 선언이다.

비욘의 문장은 그 사실을 가장 단순하고도 아름답게 되새긴다.

모름을 인정하는 순간, 앎은 다시 살아난다.


교사의 하루는 수많은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아이의 행동을 해석하고, 학부모의 말을 받아들이며,

수업의 옳고 그름을 가늠한다.

그 판단들은 필요하지만, 때로는 교실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옳다’는 확신이 커질수록, 아이의 다름은 틀림으로 보이기 쉽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문장은 교사를 한 걸음 물러서게 한다.

그 한 걸음이 바로 관계의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아이의 이야기가 들리고, 교실의 공기가 달라진다.

틀림을 허락하는 교실에서만

아이들은 실수를 통해 배우고, 교사는 아이를 통해 다시 배운다.


교사의 역할은 완벽한 판단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으로 남는 일이다.

확신을 내려놓은 겸허한 성찰 속에서 교실의 배움은 깊어진다.



비욘은 말한다.

“인생의 모든 일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 위에 있다.”


교사로서의 삶도 그렇다.

수업의 흐름, 아이의 마음, 학교의 변화 —

그 어느 것도 완벽히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다시 교실 문을 연다.

아이들과 마주하고, 배우고, 때로는 틀리며 다시 시작한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이 문장을 되뇐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인정이 나를 조금 더 겸손하게,

그리고 조금 더 열린 교사로 만들어 준다.

틀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순간,

배움은 다시 흐르고, 자유는 교실 안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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