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이 지난 위로; 배려는 사치였을까

오늘도 교장실로 달려갑니다 Episode 3.

by 차미레

새 학년 배정표가 배부되는 순간, 교무실은 정적이 흘렀다.

마치 운명을 가르는 추첨이라도 된 듯, 모두가 긴장한 눈빛으로 종이만 들여다보았다.

“어, 나 또 5학년이네. 익숙해서 좋아.”

“나는 2학년……. 아, 진짜 너무 좋아!”

잠깐의 탄식, 그리고 곧 들리는 안도의 웃음.

그 속에서 하영은 이미 손에 쥔 배정표를 뚫어져라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 글자씩 천천히 읽었다.

「6학년 2반 – 송하영」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확인했다.

‘설마……. 진짜 나야?’

오타일 거라 애써 웃었지만, 심장은 이미 얼어붙었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던 걸까?’

‘아니야, 오래 쉰 대가를 치르는 거겠지.’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생각들이 하영을 괴롭혔다.

누군가의 배려를 바랐던 마음이 갑자기 낯설게 여겨졌다.

‘육아’는 사유가 아닌 결격처럼 다가왔다. 뱃속에 아이를 품은 그 순간부터, 나는 누군가의 계산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분명했다. 6학년 담임 배정에 선명하게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

출산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첫해. 하영은 비교적 업무 부담이 적은 학년을 맡게 될 거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표를 프린트하며, 남편과 돌아가며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루틴을 상상했고, 업무 후 잠깐이라도 숨 돌릴 여유가 생기기를 바랐다.


“어느 학년 맡고 싶어요?”

발표 직전, 한 동료가 물었을 때 하영은 웃으며 말했다.

“3학년쯤이면 좋겠어요. 아직 아기가 어려서요…….”

마음속 조심스러운 소망이었다. 적어도 배려는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믿음은, 단 한 줄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하영은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와 교장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며 몇 번이나 멈칫했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 저 6학년 담임 맞나요?”

그녀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교장은 책상 위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요.”

“제가 출산휴가 후 복귀한 걸 아시잖아요. 제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건가요?”

교장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사정이 있잖아. 그럼 누가 해?

출산휴가였잖아. 다시 돌아온 거니까, 좀 힘들어도 맡아줘야지.”

그 말은 결코 배려가 아니었다.

사람의 사정을 숫자처럼 다루는 냉담한 행정적 판단이었다.

하영은 말없이 교장실을 나왔다.

6학년을 희망하는 교사는 없다.

더군다나 출산휴가로 인해 적응이 필요한 교사에게 6학년은, 말없이 건네는 징벌이었다.

그 순간, 하영은 자신이 받은 건 업무가 아니라 벌 같았다. 복귀는 환영이 아니라 심판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쉰 만큼 이제는 일해야지’라는 말은,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했다.


6학년은 쉽지 않았다.

이미 학교에 적응할 만큼 적응된 사춘기의 아이들. 커진 몸짓만큼 드센 주장들.

이미 배정이 된 만큼 하영은 해내어야만 했다. 1년을 살아내야만 했다.

점심시간에 틈틈이 학년 연구실에서 유축기를 돌리며 몇 번이나 울음을 삼켰다.

그 눈물은 감정이 아니라, 지친 하루의 끝에서 흘려보낸 한숨 같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도, 시계만 바라보며 하원 시간을 계산했다.

복도에서는

“선생님, OOO가 또 싸웠어요!”

“이건 진짜 말이 안 돼요! 선생님, 얘기 좀 해주세요!”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방금 전 해결했던 사건이 또다시 반복됐다.

의자에 앉을 시간도 없이, 매 시간마다 긴장이 온몸을 감쌌다.

그때의 하루는, 끝이 없는 점심시간 같았다.

소화도 안 된 채 뛰는 심장을 안고, 다시 교실 문을 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터지는 사건사고에, 하영은 늘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았다.

6학년 담임이 육아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영이의 진심이 통해서인지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졌다.

하영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서로를 조금씩 배려했다.

그 변화 속에서 하영은 아이들과 함께 단단해졌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저 처음엔 6학년 싫었는데요… 지금은 좋아요. 선생님이라서요.”

그 말 한마디에, 하영은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웃었다.


1년이 흘렀고, 졸업식이 끝난 뒤 송별회가 열렸다.

교장은 잔을 들고 조용히 하영에게 다가왔다. 눈은 피한 채, 잔만 건넸다.

“미안했어, 송 선생. 네 입장을 모른 건 아니었어. 다만……. 모두의 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

어색한 듯, 미안한 듯, 서툰 사과가 술잔을 타고 넘어왔다.

너무 늦게 도착한 사과는, 위로라기보다 씁쓸한 통보처럼 들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위로는 오히려 하영의 마음을 더 비워 놓았다.

늦은 인정이었다.

하영은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예요.”

담담했지만, 묵직한 진심이었다.

교감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갔다.

작별조차 하지 않은 이별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그 침묵은, 이 모든 일이 애초에 대수롭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무력감이 스쳤지만, 오래 붙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영에게는 시작이었다.

누구의 판단도, 누구의 기대도 아닌,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조용한 결심.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보다 많은 것을 버티고, 이겨내고 있지만

그 배정표 앞에서 느낀 감정은 여전히 어딘가 남아 있다.

배정표 앞에 섰던 첫 순간처럼.

하지만 이번엔 무너진 마음이 아니라 다져진 다짐이었다.

분노도 체념도 아닌,

희미하지만 단단한, 희망의 끄트머리였다.


하영은 조용히 되뇌었다.

배려는 사치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기대했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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