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교장실로 달려갑니다 Episode 1.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낯선 결정이 자리를 잡았다.
출장에서 돌아온 아침, 하영은 자신이 새로운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동료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다.
“하영쌤, 어제 회의에서 병가로 빠진 선생님 업무를 쌤이 맡는다고 발표됐어요. 알고 있었어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단 몇 시간 사이, 모든 것이 조용히—그러나 일사천리로—결정되어 있었다.
누구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반대 하나 없는 ‘만장일치’.
하영은 어느새 새로운 업무 담당자가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전날 오후, 교무실에서 마주쳤던 교감의 말이 스쳤다.
“출장 잘 갔다 와.”
평소라면 차가운 말투로 “교육청 일 또 나가냐”라며 한소리쯤 했을 교감이, 이상하리만치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던 그 순간.
그 다정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기류—
그리고 지금, 그 직감은 정확히 적중했다.
하영은 곧장 교감을 찾았다.
“교감 선생님, 병가 들어간 선생님 평가 업무를 제가 맡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말투는 단정했지만, 물음은 단호했다.
교감의 눈가에 잠깐 그늘이 스쳤지만, 그녀는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교장 지시야. 나야 뭐, 위에서 시키면 하는 거지.”
그 말은 낯설지 않았다.
지난 4월에도 그랬다. 출산휴가에 들어간 동료의 업무를 하영이 떠맡았다.
이유는 “같은 학년이니까.”
이번엔 “같은 부서니까.”
억지에 가까운 논리. 그리고 반복되는 구조.
되도록, 하영은 학교에서 나서고 싶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는 말 없는 사람이 오래 살아남았다.
입을 열면 ‘괜히 나서는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하영은 배웠다.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고, 시키면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게 이 학교에서 ‘무난하게 지내는 법’이었다.
하영은 이미 5학년 담임이었고, 영재교육 담당에 학년연구일까지 맡고 있었다.
행사가 많은 2학기에 평가 업무까지 더해지면 감당하기 어려운 과부하였다.
학년 교사 중 하영이 가장 경력이 짧았고, 그래서 매번 조용히 일을 떠맡았다.
조용한 순응은 어느새 관례가 되었고, 침묵 속에서 규칙처럼 굳어졌다.
속에서 무언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왜 항상 저일까요? 아무 말 없이 해왔던 게, 당연해진 건가요?”
교감은 여전히 눈을 들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 지시야. 나는 힘이 없잖아.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책임은 위로 던졌고, 업무는 아래로 흘렀다.
‘이건 아니다.’
하영은 결심했다.
이번엔 참지 않기로.
그날 오후, 하영은 조용히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교장 선생님, 1학기 때도 다른 선생님 업무가 저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땐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재 업무와 평가 업무는 시기가 겹칩니다.
평가 업무를 맡기시려면, 영재 업무와 교체해 주세요.
두 가지를 동시에 맡으면 담임 역할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결국 피해는 아이들에게 돌아갑니다.
그 책임을 교장 선생님께서 지신다면, 저는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단단했다.
정적.
교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교장은 몰랐다. 교감이 선조치, 후보고를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업무는 재조정되었다.
교감은 마지못해 다른 방향을 찾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교감이 아니었다.
폭풍 전야 같은 고요.
오히려 침묵이 더 불길했다.
그리고—
며칠 뒤, 하영의 교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문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교감이었다.
말없이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던 그녀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다른 사람한테 업무 넘기니까 속이 시원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툭—결재판 하나가 책상위로 날아들었다.
결재판이 허공을 가르며 떨어졌다. 종이 몇 장이 허공을 떠돌다 바닥에 내려앉았다.
하영은 몸을 숙여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하영의 진심을 짓밟았다.
하영이 원한 건 단 하나, ‘공정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늘 그렇게— 모른 척 외면했고, 흔적 없이 스쳐 갔다.
그 순간—
불쑥 떠올랐다: 이 종이 위를 지나간 수많은 ‘발자국’들이.
누군가는 보지 못한 척 걸어갔고,
누군가는 고개를 돌린 채 휘파람을 불었으며,
누군가는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다 똑같았다.
서류는 짓밟혔고, 책임은 남지 않았다.
그 종이 위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이 되어버린, 흐릿하고 낡은 발자국들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하영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다.
“그들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지나갔다.”
하영은 당황하지 않은 척,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그 일이 누구에게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다만, 그걸 정하는 방식이 일방적이라는 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하영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그러나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는 순간—손끝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의 떨림을 얼른 뒤로 감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억울함과 분노, 체념까지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작지만 명확한 신호였다.
그리고, 다시 다짐했다.
“아닌 건, 아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맞지 않는 건 맞지 않다고 말하는 것.
누군가는 그것을 ‘쓸데없는 고집’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영은 안다.
그 고집 하나가, 오늘 하루를 지탱했다는 것을.
책임감 있는 척했던 ‘그들’은 없었지만,
책임을 감당한 ‘한 사람’은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정답이 아니어도—
그건, 흔들림 없는 진심이었다.
그게 전부는 아닐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