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어 시간이었다. 내가 어떤 질문을 던졌고, OOO도 발표를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여느 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나는 '바른 자세'로 손을 든 사람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OOO은 발표 기회와 상관없이 계속 말을 했으나 나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랬더니 국어책 1장을 와락 꾸기더니 급기야는 아주 갈기갈기 찢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적이 많기에 크게 놀랍지 않았다. 그 아이의 책들은 전부 주인을 잘못 만나 표지가 멀쩡하게 붙어있는 것이 없었다. 학기말이면 모를까 학기 초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날의 국어시간은 책을 유독 더 갈가리 찢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보란 듯이 바닥에 종이를 내던지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스카치테이프를 집어 아이의 책상에 갖다 주며 말했다.
"이 교과서는 적어도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책이야. 이 찢어진 책장을 쉬는시간 동안 원래대로 붙여놓아라."
학급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해두었다. 책을 원상 복구할 때까지는 쉬는 시간에 함께 놀아주지 말라고. 아이는 울면서 책을 붙였다. 그래도 그 와중에 끈기는 있었다. 책을 한 조각 한 조각 원래 자리를 찾아서 테이프로 다 붙여놓았다. 우는 건지 화가 난 건지 눈이 새빨개진 아이에게 가서 말해주었다.
"애초에 네가 책을 찢지 않았다면 이렇게 힘들게 책을 붙여야만 했을까? 화가 난다고 해서 책을 찢는다거나 물건을 부수다가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버릇이 너에게 남아있을 거야. 어른이 되었을 때도 화가 나면 물건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되고 싶니?"
"네! 그럴 건데요?"
"그래. 그게 네가 원하는 모습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천천히 잘 생각해 봐. 이제 책을 다 붙였으니 쉬는 시간에 신나게 놀아도 좋아. 단, 앞으로도 화가 난다고 해서 일부러 망가뜨리면 앞으로도 그것을 원상 복구할 때까지 쉬는 시간은 또 없어질지도 몰라."
OOO이의 이름은 매일 같이 나쁜 소식으로 내게 전해졌다.
"OOO이가 놀이를 다 망쳐놨어요."
"OOO이가 소리 질러요."
"OOO이가 자꾸만 방해해요."
처음에는 불러서 조용히 타일렀다. 그런데 쉬는 시간이며, 수업 시간이며 그 이름이 멈추지 않고 나오니 하루가 짧았다.
"선생님~ 오늘도 OOO이가 또 방해해요!"
"얘들아, OOO이가 그러는 건 선생님도 다 알고 있어. 1학년 때부터 계속 그랬다며?"
"네! 맞아요. 지겨워요."
"선생님도 지겹다. 근데 그렇게 일러도 일러도 매일 똑같으니 이제는 그럴 때마다 선생님한테 이르지 말고, 그렇게 하면 같이 놀 수 없다고 얘기해 줘. 매일 얘기하는 거 너무 힘들다. 차라리 어느 날 OOO이가 욕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고, 소리 안 지르고, 친절하고, 다정하게 얘기한다면 그게 진짜 특별한 거니까 그날 선생님한테 이야기해 주면 어떨까?"
"좋은 생각이에요. 저희도 매일 얘기하는 거 진짜 지겨워요. 어차피 얘기해도 고치지도 않고."
"얘들아, 앞으로는 우리가 OOO이가 착한 행동을 하는지 잘 관찰하도록 하자."
함께 듣고 있던 OOO이도 멋쩍게 웃는다. 스스로도 행동이 부끄러운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OOO이의 과잉행동에 큰 반응을 해주지않았다. 아이의 입에서 욕이 점점 줄었다.
5월이 되었다. 동료 장학을 위한 공개수업이 있었고, 우리 학급에 교장, 교감 선생님과 동학년 선생님들이 모였다. 카메라를 설치해 영상 촬영도 했다.
나는 사회과 수업을 했고, 다른 지역의 친구들을 우리 지역으로 초대하는 초대장 만들기를 했다. 두꺼운 도화지를 나누어주며 자유롭게 꾸미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제각각 열심히 초대장을 만들었고, 나는 반 전체를 돌면서 어려운 점을 도와주기도 하며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다 OOO의 책상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책상을 보니 눈앞이 하얘졌다. 그 아이는 초대장 만들기 재료는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책상 전체에 딱풀을 바르고, 손으로 그것을 문지르고 있었다. 찍 늘어난 딱풀이 손등이며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바로 뒤에는 참관 선생님들이 앉아있었다.
'이게 카메라에 다 녹화되었을까. 전교 선생님들이 다 돌려보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물론 영상 전체를 면밀히 보지는 않겠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 큰 소리로 호통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귓속말로 조용히 말했다.
"너 진짜 오늘 같은 날 이러기야? 선생님 창피 주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도 좀 미안했는지 고개를 푹 숙인다. 풀이 묻은 책상을 뒤로 빼고 다른 빈 책상을 가져와 앉히고 재료를 주워 올려주었다.
"얼른 초대장부터 만들어 볼까? 선생님이 이거 수행평가할 건데. 안 만들거니?"
"손이 끈적끈적한데..."
한숨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연필로 내용만이라도 적으면 꾸미는 것은 나중에 하라고 했다. 도와주면서 귓속말로 다시 얘기했다.
"너 이 책상에 풀 끈적임이 남으면 안 된다. 이 책상은 네 책상이 아니야. 우리 곧 자리도 바꿀 건데 이렇게 해 놓으면 어떡하니..."
수업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모르겠다.
OOO은수업이 끝난 후 책상을 한 시간도 넘게 닦고 또 닦아야만 했다. 거의 된 것 같아도 만지면 끈적였다. 닦는 동안 나는 내 업무만 봤다. 잔소리는 따로 하지 않고, 중간중간 말없이 책상을 만져보러 갔다.
"더 닦아야 해."
"아직도 여기가 끈적거린다."
이번에는 울기보다는 오기가 발동한 듯해 보였다. 성격은 또 의외로 꼼꼼해서 구석구석까지 닦으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