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목적으로서의 독서와 수단으로서의 독서

by 현목

지난 6월 23일 NHK 아침 6시 탑 뉴스로 다치바나 다카시 씨가 80세로 사거(死去)하였다고 보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았더니 4월 30일에 이미 사망하였고 원인은 급성관증후군(急性冠症候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병명으로는 심근경색이라고 합니다. 이미 2007년에 방광암에 걸린 병력이 그에게는 있습니다. 일본의 방송에서는 그를 ’지의 거인(知の巨人)‘이라고 불렀습니다. NHK에서는 6월말, 7월초에 걸려 그의 특집을 낼 모양인데 그가 사망한지 한 달 반이 넘어서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는 게 잘 이해는 안 됩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고인이 그렇게 하라고 했거나 가족들이 조촐하게 장례를 치르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오래 전부터 다치바나 다카시는 저에게는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선 그의 장서는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고 책에 대해서 쓴 글도 저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그의 사망 소식도 듣고 보니 그의 책을 보다가 중단해 버린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가 생각나서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다 읽고 나니 그의 생각과 저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독서가가 아니라 책을 읽어서 원고를 쓰고 먹고 사는 직업인입니다. 야후 재팬에 들어가면 그에게 붙은 수식어가 저널리스트이며 평론가였습니다. 저널리즘의 정의는 ’활자나 전파를 매체로 하는 보도(報道)나 그 밖의 전달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많은 책을 읽고 그 내용(정보)를 전달하는 신문기자인 셈입니다. 다만 보통 신문기자보다 그는 독서를 어마어마하게 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다치바나의 독서력(讀書歷)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책벌레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서평지의 편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컸습니다. 대학 시절(동경대학 불문과 졸업, 철학과 중퇴)에는 문학책을 많이 읽었고 한때는 도스토예프스키만을 읽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의외로 시나 소설 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고전보다는 20세기 문학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다치바나는 그의 서재 이야기가 유명한데 그의 서재의 역사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30대 중반까지 그의 서재는 ’사과상자 시대‘였습니다. 당시의 사과상자는 지금처럼 종이가 아니라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속에다 책을 넣으면 좋은 책장이 되는 셈입니다. 집에서 많을 때는 60개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 40대 때는 자신의 집 두 평, 다른 두 군데의 아파트에 방을 빌려 책을 보관했습니다. 드디어 52세 때 다치바나는 그 유명한 ’고양이 빌딩‘을 건축합니다. 대지 10평에 건평 7평(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건물 끝이 둥글게 튀어나온 가늘고 긴 삼각형의 건물입니다. 장서가 3,5000권이 이릅니다. 건물의 둥글게 튀어나온 부분에 당시의 유명한 무대미술가 세노 갓파(妹尾河童)가 고양이 얼굴을 그려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습니다.


다치바나의 책읽기의 기본적인 요소는 두 가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취재 혹은 조사를 위해 책을 읽습니다. 하나의 테마에 500권 정도를 읽기도 한다고 하는데 엄청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이것은 그의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책읽기의 저변에는 지적 욕구가 있습니다. 다치바나는 인간의 본능적 요구는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개체를 유지하기 위한 식욕과 종족 유지를 위한 성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것 외에도 지적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동물과의 큰 차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적 욕구가 오늘날의 인류문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치바나는 물론 직업으로서의 책읽기도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남다른 지적 욕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다치바나에게 막연히 가졌던 저의 생각들이 많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책읽기에서 다치바나와 저와 다른 점은, 그의 책읽기는 생계형이고 저는 생계형이 아니라 취미 혹은 인문 교양(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넓히기 위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와 채읽기의 스타일이 다릅니다. 그는 빠른 속도(속독)로 많은 정보를 모아서 전달해야 합니다. 반면에 저는 느리게, 책에서의 지적 정보보다는 정서라든가, 문장력의 미감이라든가 생의 어떤 원리를 찾기를 바랍니다.


같은 맥락이지만, 다치바나는 책읽기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눕니다. 목적으로서의 독서와 수단으로서의 독서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책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즐거움입니다. 후자는 책 속에 담겨져 있는 지식 혹은 정보를 얻으려는 수단으로서 읽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자는 저의 경우이고 후자는 다치바나의 경우입니다.

다치바나는 자신의 책읽기에서 ’재미‘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문학작품 등을 많이 읽었지만 논픽션을 알고 나서부터는 ’재미‘와 역동성에서 문학작품은 논픽션을 따라올 수 없어서 자신이 문학작품과 멀어지게 되는 이유라고 밝혔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좋아하는 최신 과학 정보라든가 정치적 탐색 기사의 ’재미‘가 티비 연속 드라마보다 재미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이 우선은 ’재미‘일지 몰라도 인간은 ’재미‘만을 가지고 책을 읽거나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재미‘가 없을지라도 거기서 감동이나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닐까요.


다치바나가 논픽션이 개인적으로 재미있다는 데까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으나 문학가의 ‘상상력이 빈약하다’느니, 학창시절 읽은 책들이 ‘쓸데없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을까요. 온 세계의 문학가들이 지금도 ’빈약한 상상력‘ 때문에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치고 해마다 그 빈약한 상상력을 노벨상으로 보상하는 것은 다치바나에게는 어처구니 없는 짓이겠습니다. 더구나 책의 뒤쪽에 가면 그는 쓸데없다는 철학가, 문학가의 말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교양의 바탕에 철학가, 문학가의 사상이 이미 배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현실의 사건만 알고 재미만 있어야 하는지, 현실의 사건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재미‘가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삶의 근본 원리를 깨닫자는 데 있습니다. 사건 즉 논픽션이라도 그냥 ’재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픽션보다 논픽션에 경도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뭐라고 토를 달 수는 없지만 픽션은 쓸데없다는 말은 아무리 다치바나라고 해도 편향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다치바나는 철학책에 대해서도 칸트, 헤겔, 토마스 아퀴나스, 등을 말하면서 난해해서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니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럼 그 어렵다는 물리학도 어려우니까 내팽겨쳐도 될 것이 아닌가요. 다치바나가 의외로 자기중심적 사고를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플라톤이 고전인데 그것을 읽는 것은 내용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매체로 역할을 해서 서로 이야기하는 공유의 장을 마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우주에 관한 지식, 임사 체험의 지식이 삶에 뭐 그다지 영향을 주는지 묻고 싶다. 그런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풍요로운 자신의 인생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5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인간의 지(知)가 비약적 발전을 하여 인간이 생활하는 데 엄청나게 편리해진 것 뿐입니다. 옛날에는 걸어다니던 것을 이제는 차로, 비행기로 아니 우주선까지 이용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동한다는 기본 원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문명 덕분에 인간이 사는 데 편리해진 이런 지에만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다치바나의 주장은 너무 한쪽만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치바나의 이런 생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치바나의 성향이고 취향이니까 말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고전에는 지가 빈약하니 읽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식의 말은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재미있고, 지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 최신 지에 대한 공부를 통해 보다 풍요로운 세계를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칸트의 3대비판서를 평생 읽으면서 지식보다는 도덕실천에 온몸을 던져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결코 다치바나의 지의 축적보다 못한 일이 아닙니다. 이걸 다치바나는 알고도 언급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최신 지식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은 수준이 안 된다고 안하무인하는 것인지 착각이 듭니다. 다치바나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남의 지식을 요약하고 전달하는 것이 주업입니다.


다치바나의 책읽기 혹을 글쓰기의 목표는 놀라운 지식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우주의 지식을 많이 알고 사는 사람이 분명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주의 지식을 모르고 사는 사람의 인생은 ‘쥐구멍’ 속 인생이 아닐까요.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라는 지식을 그의 책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다치바나 식이라면 이런 어마어마한 과학적 지식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게으르고, 지식 욕구도 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읽고 저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을 읽을 때 단어가 표현하는 그대로 문장을 읽거나 문장이 표현하는 그대로 책 전체를 읽으려 하지 말고, 책 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그 흐름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치바나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저에게 주는 가장 귀한 정보였습니다. 저는 이제껏 책을 읽으면서 여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이제 다치바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나는 책이란 만인의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건 사람이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학에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무엇을 배우려고 한다면 인간은 결국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을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일생 동안 책이라는 대학을 계속 다니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다치바나는 책읽기에 관한 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깊고, 넓게 수행하여 온 분임에는 틀림없고 또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지의 거인‘이라는 명예로운 명칭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지성만이 아니라 감성과 상상력과 이성이 있습니다. 저로서는 책읽기를 지적 욕구, 지식의 축적이라는 면에 너무 한정시키고, 또 그것만을 상찬하는 다치바나의 안목에는 조금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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