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 작가와의 개인적 인연은 오래 되었습니다. 그분의 소설 한편(이름은 잊었지만) 정도와 수필집 한두 권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2005년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무언가 시적인 것을 느끼고서는 이건 베껴쓰기를 해야겠다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용두사미가 되어버려 세 개 정도 제목의 글을 베껴쓰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2020년에 다시 구입한 『자전거 여행』은 합본이었고 풍경 사진도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강빈의 사진도 그냥 꼽사리 끼는 것이 아니라 사진 한장한장이 품위가 있었고 어떤 의미조차 읽을 수 있었습니다. 완독한 후에 옛날에 못했던 것을 이번 기회에 하자고 퇴근 시간 전에 베껴쓰기를 하여 13개월만에 마쳤습니다.
김훈 작가는 저와 동갑이어서 그런지 같은 시대를 살아왔다는 의식이 있어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가 고려대 영문과를 다니다가 여동생이 대학을 가는 통에 집이 가난하여 자신이 중퇴를 했다는 것과 한국일보 기자를 했다는 것이 저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를 직접 본 적은 없고 사진만으로도 그의 얼굴의 눈매와 흰머리카락을 보면 뭔가 당당하면서 남자다운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글쓰기도 여성적이기보다는 남성적으로 보입니다.
『자전거 여행』은 한국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곳곳을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쓴 수필로서 기행문에 속합니다. 수전 티베르기앵은 그녀의 『글쓰는 삶을 위한 일년』에서 여행 에세이의 세 가지 요소를 지적합니다. 첫째 강렬한 개인적 경험이 있고 둘째 상상을 자극해야 하고 셋째 여행하는 장소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담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김훈 작가는 한국의 유명한 명소를 자전거로 탐방할 때의 자신의 경험과 그 장소의 역사와 문화를 유려하게 소개합니다. 그러한 것은 우열은 있을지 몰라도 여행기를 쓴다면 누구나 다 표현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 작가의 이 여행 에세이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감명받은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의 문장들이었습니다. 그 문장들을 보면서 선망과 함께 좌절을 느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어떻게 같은 것을 보면서 김훈은 저렇게 쓰는데 저는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회오(悔悟)라고나 할까요.
중학생인 손자를 위해 이혁의 『논술의 정석』을 읽어보라고 보내주면서 제가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명제―참이나 거짓의 내용이 들어 있는 문장이라고 하는데, 그것조차 어럽다면 그냥 문장이라고 보면 된다고 합니다―에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있다고 합니다. 분석명제는 주어에 속한 속성을 술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개념을 술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분석명제는 참이지만 지식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은 변이 세 개다”에서 삼각형이라는 주어의 속성 중에 이미 변이라는 속성이 들어 있습니다.
반면에 종합명제는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속성을 술어로 새로이 주어에 덧붙여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개념을 넘어서서 술어를 표현합니다. 종합명제는 지식을 확장합니다. 그러나 종합명제는 분석명제가 가지는 필연성을 결여합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은 황금빛이다”에서 황금빛은 주어 삼각형의 속성이 아니고 필연성도 없습니다.
제가 분석명제, 종합명제를 전문가도 아니면서 운운하는 것은 이것들이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데서의 표현방법을 결정짓는 요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메타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파블로 네루다는 “시는 메타포다”라는 극언까지 했습니다. 메타포는 우리의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현실에서 인과율로 나타나는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그려지는 상상의 문장입니다. 이 메타포야말로 종합명제라는 생각이 제게 미쳤습니다. 평범히 우리가 서술하는 진술은 대부분이 분석명제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주어의 속성을 술어로 표현하니까 상상도 필요하지 않고 인과율에 들어맞으니까 읽는 사람도 별로 긴장과 갈등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은유는 유사성을 축으로 한 은유와 차이성을 축으로 한 은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종합명제는 이 두 가지의 은유를 또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의 상상에 의해 미적 쾌감을 일으키는 기전에 대해서 칸트는 그의 『판단력비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정신을 감성, 상상력, 지성, 이성으로 나눕니다. 우리의 감성 자료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가 되어 지성의 어떤 개념과 일치할 때 우리는 미적 쾌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김훈의 아름다운 은유의 문장을 읽으면서 미적 쾌감이 생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의 각 제목들의 대부분의 글들은 어떤 패턴이 있었습니다. 대개 처음에 상상을 자극하는 메타포의 문장들이 서론격으로 상당히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는 여행지의 정보라든지 감상을 평범한 서술문으로 적고 있습니다. 그 앞에 나오는 메타포의 글만을 제가 대충 뽑아보니까 A4용지로 30페이지 정도 되었습니다. 이것만 읽는 것도 제게는 즐거움이고 또 배움이었습니다. 그 많은 문장 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보겠습니다. 매년 봄이면 매화와 산수유와 목련을 보고, 냉이달래국이나 쑥국을 마십니다. 이걸 김훈은 어떻게 상상하여 표현하는지 보겠습니다.
「꽃 피는 해안선」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럼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는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꽃잎을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 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오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은 냉큼 죽지도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환자 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쩍,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흙의 노래를 들어라」
-국 한 모금이 몸과 마음속에 새로운 천지를 열어주었다.
-국물 속에 눈물이 섞여 있는 맛이었다. 겨울 동안의 추위와 노동과 폭음으로 꼬였던 창자가 기지개를 켰다. 몸속으로 봄의 흙냄새가 자욱이 퍼지고 혈관을 따라가면서 마음의 응달에도 봄풀이 돋는 것 같았다.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로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癡情)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의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 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이 평화 속에는 산 것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힘이 들어 있다.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란 흔치 않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 있다.
-달래는 냉이와 한 짝을 이루면서도 냉이의 반대쪽에 있다. 똑같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태어났으나 냉이는 그 고난으로부터 평화의 덕성을 빨아들이고,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끝을 만들어낸다. 달래는 기름진 땅에서는 살지 않는다. 달래의 구근은 커질 수가 없다.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으로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 이 여린 것들이 언땅을 뚫고 가장 먼저 이 세상에 엽록소를 내민다. 쑥은 낯선 시간의 최전선을 이끌어간다. 쑥들은 보이지 않게 겨우 존재함으로써, 이 강고한 시간과 세월의 틈새를 비집고 나올 수 있는 모양이다. 그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 쪽으로 끌려간다. 국물 속의 쑥건더기는 다만 몇 오라기의 앙상한 섬유질만으로 남는다. 쑥이 국물에 바치는 내용물은 거의 전부가 냄새이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 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
김훈의 은유의 특징 중 하나는 관념을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관념의 이미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입니다. ‘숲은 그 나무나무 사이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신성하고, 현실을 부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불온하다.’
김훈의 산수유 문장들을 보통 사람들이 서술하는 방식으로 부족하지만 한 번 써보겠습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럼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는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를 보니 꽃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림자에는 햇빛이 들어와 밝게 보인다.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 있다.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산수유를 멀리서 보면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파스텔화처럼 번져 있다. 산수유는 언제 지는지 알 수 없다. 어느 날 가보니 산수유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스스로 떨어진 모양이다. 산수유가 없으니 쓸쓸하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으로 좀더 확연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김훈의 메타포는 격이 높습니다. 이건 원리를 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고 젊어서 수련을 하여 몸에 배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메타포를 쓸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미 글쓰기의 습관이 굳어져 있어 고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는 도리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