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두렵지 않다』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임사체험은 과학과 종교의 경계선이다

by 현목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를 다 읽고 나서 그의 책 중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나 찾아봤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2015년부터 요양병원에 근무합니다. 어쩌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을 매일 보고, 한 달에도 몇 번이나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을 진찰하고, ‘사망했음(Expired)’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 저인데 솔직히 말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죽음은 두렵지 않다’라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따라서 다치바나는 왜 ‘죽음은 두렵지 않다’라고 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남의 일처럼 들립니다. 언젠가는 자신에게 들이닥치겠지만 현실감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죽음이 초래하는 결과를 상상하면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히 헤어지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실은 모르는데 죽어서 한줌 흙이 되는 건지, 사후세계가 있는 건지, 생각하면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다치바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이 왜 자기에게는 두렵지 않게 되었는지 의외로 심각하게, 깊게 파고 들지 않고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마저 여기저기에다 써놓았습니다. 제가 ‘죽음은 두렵지 않다’라는 주제에 따라서 나온 그의 말들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첫째, 나이가 들면서 죽음과 가까워지니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 임사체험을 취재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 다치바나가 직접 한 말을 인용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방송을 통해 보여 주었다고 생각해요.”

넷째, “죽는다는 건 결국 꿈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체험이니, 꿈을 꾸겠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죽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다치바나가 죽음을 두렵지 않게 된 이유는 나이, 새로운 지식, 이성(理性), ‘꿈의 세계’라는 네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네 가지 근거만을 제시해 놓고 그에 대한 부연설명이 없습니다. 이래서는 읽는 사람으로부터 ‘아, 이래서 다치바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구나’ 하는 설득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막연히 그럴싸한 말만 했지 아무런 울림이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생자필멸이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성으로 판단해도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위의 주장 네 가지를 가지고 챕터를 만들어도 할 말을 만들어 간다는 게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을 처음 조금 읽자마자 약간 속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활자가 크고 문장 간의 스페이스가 너무 넓어 종이를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통 책 같으면 175페이지를 반으로 줄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페이지가 빨리 넘어가서 좋은 점도 없지 않습니다만. 일본책 원본을 찾아보니 손바닥만한 문고판으로 페이지가 197이었습니다.


다치바나는 책 제목과는 간접적으로는 상관이 있는 테마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임사체험, 사후세계 여부, 의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임사체험은 말은 막연히 들어왔지만 실제로 무엇인지는 그 동안 잘 몰랐습니다. 다치바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의학적으로도 그럴 듯(reasonable)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임사체험은 사후체험이 아닙니다. 죽고 나서 어떤 체험을 하고 난 후에 어떤 경위를 통해 살아났기 때문에 사후세계는 이렇다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임사체험은 사고나 질병으로 죽음의 위기를 맞고 나서 다시 의식이 돌아온 후에 들려주는 시각적 체험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심정지 후에 아마도 수십 초 동안 신경이 살아 있어 뇌파가 계속 이어진다고 합니다. 진정으로 사망하기까지의 동안에 ‘뇌의 활동으로 만들어내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시각체험, 체외이탈, 초월적 존재와 만나고, 행복한 기분이 들고(이때 세로토닌의 분비가 대량 증가하는 것으로 봅니다), 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임사체험은 사후에 체험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뇌가 꾸는 꿈에 가까운 현상’이라고 합니다.


사후세계란 무엇인가요? 결론은 모른다입니다. 사후세계는 임사체험과 연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어쨌든 사망이라고 진단을 받고 다시 돌아와서 비록 꿈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체험을 사후세계와 연관을 짓기 때문입니다.


임사체험은 과학과 종교의 경계선입니다. 임사체험을 단순히 과학적으로 설명하여 심정지 후 뇌신경이 잠시 꿈을 꾼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그만입니다. 여기까지는 과학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임사체험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교이거나 유물론자들은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모두 물질로 돌아간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다치바나도 무교이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상을 신봉한다고 하면서도 사후세계를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관념의 문제이지 과학이나 논리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다치바나는 그 예로서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듭니다. 두 책은 같은 내용을 전자는 신화적으로, 후자는 편년체(編年體)로 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임사체험을 가지고 누구는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누구는 종교적·신비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각자의 믿음과 희망에 달렸습니다.


사실 이 책을 보면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 스위스 취리히의대 나와서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를 지냄)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죽음 전의 인간의 심리상태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타협―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녀가 폴란드의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견학합니다. 그곳은 2차세계대전 때 수없이 많은 유대인 어린이가 학살당한 곳입니다. 퀴블러 로스는 침대 벽에 죽음의 공포에 떨던 아이들이 그린 나비 그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어린이들은 거의 임사체험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은 사후세계에 대한 희망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퀴블러 로스 박사는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아직 고치 안에 있어. 하지만 이제 곧 나비가 되어서 날아갈 수 있단다. 나비가 되는 건 고치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멋진 일이야.” 박사는 우리의 육체는 고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죽음이란 오히려 인간 존재를 이 세계에 묶어두고 있는 육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퀴블러 로스 박사의 생각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죽음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같은 사안’을 두고 『고사기(古事記)』 식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서기(日本書紀)』 식으로 파악할 것인가는 결국 자신의 소망과 믿음에 달렸습니다.


의식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인류 최대의 수수께끼이자 현대 과학자들에게 가장 뜨거운 이슈라고 합니다. 우리의 뇌, 예컨대 전두엽, 측두엽, 두정엽, 후두엽이 있다면 각각 맡은 역할이 있으나 그것을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즉 감각, 감동, 행동, 기억과 자아를 의식하는 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 같습니다. 줄리오 토노니 교수는 의식이 뇌의 특정한 부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속에서 정보와 정보가 연결되어 만들어내는 네트워크의 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확히 밝혀진 건 아니라고 합니다.


죽음, 임사체험, 사후세계, 의식이란 테마는 의학과 관련이 있어서 저에게는 낯선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심도 있는 설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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