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수레바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우리의 몸은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다.”

by 현목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이 책은 그녀의 자서전입니다. 스위스 취리히의 최대의 사무용품 회사의 부사장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서 소녀시대는 평화봉사단 같은 봉사단체에서 일하고, 취리히 의대를 나오고, 같은 대학에서 유대인 출신의 미국인 매니를 만나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주해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면서 정신과 의사로 지냈습니다. 그녀는 보통 정신과 의사와는 달리 정신분열환자 같은 전형적인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죽음에 대해 관심으로 가지면서 병원 의사로 지냅니다. 50대에는 매니(병리학 전공)와 이혼하고 78살에 뇌졸중을 여러번 겪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퀴불러 로스는 죽음을 임한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로 분석하였고 그것은 정신의학사에서도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대단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그녀의 말과 행동에 같은 의사로서 고개가 갸웃거리는 점도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퀴블러 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죽음을 맞이한 환자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고 섬세하고 애정어린’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몇 시간이든 죽어가는 환자들 곁에 머물며 말을 걸었다’라는 말도 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그 좋은 예로 흑인 여자 청소부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흑인 여자 청소부가 한 말은 단지 ‘손잡고’,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다’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이 말 한마디만 있으면 그는 편안히 죽음을 임할 수 있다는 게 퀴블러 로스의 생각입니다. 사실 이해는 갑니다. 요양병원의 환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약물보다는 가족의 사랑과 관심뿐입니다. 그들에게는 남은 죽음의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그것이 그렇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약간 의심이 갑니다. 여러 가지 업무를 하는 의사로서 퀴블러 로스가 요구하는 이런 수준을 맞출 수 있는 의사가 현실적으로 과연 얼마나 될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이것이 퀴블러 로스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합니다만―이른바 ‘나비 사상’입니다. 이것은 이 책을 번역한 분이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나비의 수수께끼에 빠진 것은 소녀 시절 폴란드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나치스의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날 밤을 보낸 막사의 벽마다 가득 그려진 나비 그림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강한 의문을 갖습니다. 왜 나비일까? 의문이 풀려진 것은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가 지나서였습니다. 그때를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전합니다. “지금에야 겨우 그것을 알게 되었다. 포로들은 죽음을 앞둔 환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머지않아 나비가 될 것을 알고 있었 다. 죽으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 더 이상 고문도 없다. 가족과 헤어질 일도 없다. 가스실로 보내질 일도 없다. 이 소름끼치는 삶도 이제 그만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벗 어나 날아오르듯이 곧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나비의 그림은 포로들이 후세에 남기고 싶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주어진 숙제를 다 마치고 나면 이제 몸을 벗어버려도 좋다.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번데기를 품은 고치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다.” 이 과 정을 실제로 거쳐 인생 최대의 경험을 하게 된다. .. 죽음의 경험에는 고통도 두려움도 불안 도 슬픔도 없다. 다만 나비로 탈바꿈해갈 때의 따스함과 평온이 있을 뿐이다.


퀴블러 로스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을 감싸고 있는 고치이고 우리가 죽으면 영혼은 고치인 우리의 몸을 떠나 사후세계로 간다고 합니다. 이때는 고통과 두려움, 불안, 슬픔이 없고 평온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말은 타당할까요. 칸트는 육신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고 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육신이 없는데 병도 없을 것이고, 의식주도 해결할 필요도 없고, 인간관계의 갈등도 없을 것 같은데 거기에 무슨 고통, 두려움, 불안, 슬픔, 기쁨이 있을까요.


우리는 흔히 ‘영혼’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 영혼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정신이나 의식 작용과 영혼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영혼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깃들어 ①마음의 작용을 맡고 ②생명을 부여한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 실체.’ 영혼은 의식처럼 형태가 없습니다. 에너지인지 몰라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비물질적 실체’입니다. 그 영혼이 사후세계에서 평안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과연 과학을 전공한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인지 의문이 듭니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과학자입니다. 목사와 같은 종교가가 이런 말을 했다면 일응 수긍이 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팩트(사실)냐와 믿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퀴블러 로스의 ‘나비 사상’의 견해가 굳이 아니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류에게 긍정적 효과를 준다면 부정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믿음과 소망에 따라서 그렇게 행동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과학자로서 어폐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임사체험으로 수많은(2만 명?) 케이스를 접하면서 모든 임사체험이 아주 비슷하므로 그 진실성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이지 정확한 진실은 아닙니다. 퀴블러 로스는 임사체험을 네 단계로 구분합니다.

1단계: 육체에서 빠져나와 공중에 머문다. . 체외이탈한 사실을 알아차린다.

2단계: 육체를 버려두고 다른 차원에 들어간다. .. 영과 에너지밖에 없는 세계에 있었다.

3단계: 수호천사의 안내로 3단계로 들어간다. 터널을 지나 눈부신 빛을 목격한다.

4단계: 최고의 근원 앞에 섰다. 이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제 생각에는 퀴블러 로스는 임사체험과 사후세계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때까지만 해도 생리학이나 신경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임사체험은 사후의 몇십 초 사이에 죽은 사람이 겪은 ‘꿈’같은 경험으로 말합니다. 죽고 하루 있다가, 일주일 있다가 살아 돌아와 사후세계는 어떻다고 말한 사람은 아직은 없습니다. 혹자는 심정지가 되어 뇌파가 없어진 다음에 경험한 것이니까 우리의 의식과는 다른 ‘영혼’이란 것이 분명히 있다라고 말합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정확한 얘기는 할 수 없으나 많은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사후세계는 영적세계입니다. 인간 탄생의 전의 세계에서도 영적 세계의 영이 누군가의 정자와 난자가 만난 순간에 들어왔다는 얘기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의식이 성숙되듯이 영도 그렇게 성숙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후세계도 그렇게 잘 기억한다면 영은 태어나면서 어머니 자궁 속에서의 일들을 우리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임사체험도 전하는데 ‘임생체험’을 영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지엽적인 문제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저로서는 당혹스러운 점이 있었습니다. 퀴블러 로스는 스위스 취리히 출신으로 그녀는 상류층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스위스 굴지의 사무용품 회사의 부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미국에 가서는 겨우 43세에 어마어마한 저택에서 사는 상류층이었습니다. 이런 환경의 사람이 진정으로 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평생 35년 동안 진료비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게 과연 말이 되는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개인병원을 경영한다고 해도 진료비를 안 받고 어떻게 병원을 꾸려나간다는 말인지, 혹은 봉직생활을 한다고 해도 경영주가 그걸 용인할 수 있는지 헷갈립니다.


영혼, 요정, 수호 천사를 언급하고 심지어는 만났다는 그녀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는 민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일반적인 강연을 하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건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배운 것이 해부학, 병리학, 생리학, 생화학일 텐데 도무지 어떤 사고방식인지 어안이 벙벙합니다. 또 한가지는 같은 정신과 의사로서 약물치료하는 것을 거의 혐오수준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참으로 의사라면 그런 주관적 의견을 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따뜻한 말로서 상담하고 위로하며 치료하는 방법과 약물을 투여하는 의사의 방법과 어떤 것이 더 나은지 비교분석하는 연구논문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언급은 없고 단지 자기식이 가장 인간적인 접근이라고 말합니다.


퀴블러 로스가 자신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마음이 바뀌어 신의 관대함에 감사하였다고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좋은 죽음과 ‘나비와 고치’ 이야기를 대중에게 이야기하면서 정작 자신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스럽습니다.


아마도 1960년대쯤의 정신의학의 수준에서는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임한 사람들의 심리적 5단계에 대한 발견은 탁월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누구나 그것을 인용하니까요.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애정어린 따뜻한 말과 위로의 접근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상의 핵심인 ‘고치와 나비’의 얘기와 임사체험 내지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은 인문학적으로는 상당히 멋있는 접근일 수 있으나 과학적 입장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장의사 다음으로 죽음을 대하면서 살아가는 저로서도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이 없을수는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사후세계는 사고력이 뛰어난 인간이란 동물의 ‘영적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생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어진 수명 동안 희노애락을 겪다가 그냥 무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영생을 하고 싶은 욕망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습니다.


죽음이란 우선 심장과 폐의 작동이 멈춤으로써 세포 수준에서 모든 생명 현상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육체를 구성하던 물질들은 부패하면서 모두 지구로 귀속됩니다. 다만 뇌사가 일어나서 의식이라는 정신현상이 그냥 사라져 없어지는 것인지, 그 정신현상의 핵심이라고 하는 ‘영혼’은 남아서 사후세계를 이루는지는 지구의 온갖 민족들이 자기나름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문화로써 남아 있습니다. 남는 것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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