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라 버스야』 정현종

by 현목

정현종 시인은 연세대학 철학과를 나와서 철학이 아니라 시인의 길을 걸은 것이 독특하게 여겨졌습니다. 연세대학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은퇴를 했다고 합니다. 시인으로서 시집도 많이 발간했지만 특이한 것은 세계의 수많은 시인들 중에서도 스페인어를 하는 남미의 시인 네루다와 바예호 그리고 스페인의 로르카에 관심을 가지고 소개하고 번역도 했다는 점입니다.


산문집은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제목도 ‘날아라 버스야’라고 하니 뭔가 생뚱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산문들은 역시 교수를 한 분인지 지성적인 면과 특히 시인이라서 단순히 직설적으로 쓰지 않고 상상이 들어간 문장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산문인 ‘재떨이, 대지의 이미지’라는 글은 재떨이에 대한 경험을 대부분의 수필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에피소드 위주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정현종 교수의 안목과 관점이 탁월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필의 시적 표현과 사고의 깊이가 따라잡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냥 일상의 에피소드를 쓴 수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빛-언어, 깃-언어‘는 저에게 다시 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정현종 교수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남미의 시인 로르카, 바예호, 네루다를 소개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수확 중 하나가 로르카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어쩌면 진부한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웬만한 시인이라면 시론에 대한 책을 내는 것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10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논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간략하게 정현종 교수가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 저나름 정리해 두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시의 정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다. 형식에 따라 정형시ㆍ자유시ㆍ산문시로 나누며, 내용에 따라 서정시ㆍ서사시ㆍ극시로 나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함축적‘이란 말과 다른 하나는 ’운율적‘이란 말입니다. ’함축적‘이란 ’말이나 글이 어떤 뜻을 속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시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에둘러 말하는 것입니다. 시는 주로 행간이나, 혹은 시 전체를 통해서 시인의 속뜻을 짐작하여 알아듣도록 둘러대는 것입니다.


’운율적‘이란 음악적 요소로서 강약, 고저, 장단, 반복입니다만 다시 말하면 리듬(반복되는 규칙적인 음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옛날의 정형시에서는 그것이 뚜렷하였으나 자유시로 되면서 그런 형식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행의 길이의 다양성, 혹은 반복에 의해 리듬은 살아 있다고 봅니다. 산문시는 자유시에 비해서도 형식적으로는 많이 없어졌습니다만 정진규 시인의 말에 의하면 산문시도 함축적 공간과 음악적 리듬은 내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정현종 교수는 시의 원천은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때(10년 전 「사물의 꿈」이라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했을 때)의 나의 믿음은 사물의 꿈이 곧 나의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의 시적 대상들은 나를 통해서 그들의 꿈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정현종 교수에 의하면 시의 공간, 즉 나와 나 아닌 것, 이것과 저것, 서로 다른 것들이 자기이면서 동시에 자기 아닌 것이 될 수 있는 공간이 시의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두 사물이 만나는 접점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융합의 공간은 정현종 교수에 의하면 맨정신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취해야 합니다. 상상하여 융합의 공간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활동을 바슐라르는 ’몽상‘이라고 불렀고, 역사적 사회적 기억에 ’상상력의 착색‘을 가하며 ’이미지의 분위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는 꿈꾸기, 즉 상상력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시쓰기의 또 하나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질 찾기입니다. 정현종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적인 눈은 그것이 아무리 으리으리하다고 하더라도, 겉에 머무르지 않으며, 허상에 귀의하지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는 표면과 더불어 표면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며, 안팎에 동시에 머물면서, 흔히 보이지 않는 것에 보여서 마지 않는 눈이다.‘ ’다시 말해서 감각이라는 표현은, 시인이라는 감각의 고고학자들에게는, 이제 표면이 아니라 오감의 빨대가 빨아들인 것들로 이루어진 지층이라는 얘기이다.‘ 시인의 혜안을 통하여 그 사물의 특징, 즉 본질을 찾아서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시쓰기는 꿈꾸기이고 사물의 본질을 찾기라고 한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도구, 혹은 기교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비유법이라는 수사법을 통한 여러 가지로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그 핵심은 ’메타포‘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정현종 교수도 새벽 숲을 걸으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의 빛과 새를 나는 지금 은유로 읽으려고 한다. 시의 언어는 말하자면 그 빛이나 새와 같은 것이다. 시는 바로 빛-언어이며 깃-언어이다. 되풀이할 것도 없겠지만, 사물을 새벽의 여명처럼 창조하는 말, 끊임없는 시작으로서의 말, 빛 속에 떠오른 하얀 숲길 위에서 날아오른 그 새처럼 무겁고 무거운 걸 가볍게 들어 올리는 말―시는 그러한 말이며,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문학의 장르라고 하면 시, 소설, 희곡을 듭니다. 돈이 제일 안 되는 시가 언제나 문학의 장르라고 하면 제일 먼저 거명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시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정현종 교수의 말을 또 인용합니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감동한다는 것, 시를 읽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의식이 팽창한다는 것은 시적 언어 공간이 우리를 뱄다는 이야기이며, 그리하여 우리가 새로 태어난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시를 숨쉰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숨을 불어넣어서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우리를 무거움에서 해방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바람처럼 움직여 우리를 활력 속으로 열어놓으며 그래서 세상의 생기인 원천이 되어 왔습니다.‘


시는 영혼의 ’강장제’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되면서 사는 데 편리한 점은 있으나 인간 정신의 황폐화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반대급부일 수 있습니다. 시는 이런 인간 정신의 시원에 대한 향수, 뿌리 깊은 그리움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의 태생의 원천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정현종 교수는 남미의 시인, 바예호, 네루다, 로르카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예호(Cesar Vallejo)는 페루 시인으로 1892년에 태어나서 1938년 열병에 걸려 파리에서 죽습니다. 그는 평생 총 네 권의 짧은 시집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페루의 국민시인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현종 교수가 지적하는 것은 시의 ‘진정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시가 있고 또 그것들을 평가하는 기준도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어떤 종류의 작품이든지 간에 그게 진짜냐 가짜냐 하는 걸 판별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진정성이라고 할 때, 바예호는 진짜 시인임에 틀림 없다.‘


시를 쓴다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감흥 혹은 사상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교가 있습니다. 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수가 전하는 가사의 내용과 곡 자체의 기교적인 면이 있습니다. 찌들리게 가난했던 바예호는 그의 삶 자체가 시적이라서 굳이 상상력을 요하는 ’메타포‘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진술로도 충분히 바예호의 감성을 감동을 가지고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표현 방식은 오히려 어렵다면 더 어렵습니다. 자칫하면 진부하거나 감상적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루다는 칠레 사람으로 1904년에 태어나서 197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71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서 더 이상 언급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제가 네루다 하면 항상 기억하는 말이 있습니다. ’시는 메타포다.‘

정현종 교수는 격찬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확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시를 읽고는 안목이 사소한 데 매이기보다는 스케일이 크다고 느꼈습니다. ’네루다의 시는 언어라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생동이다.‘ 19세 때 그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라는 시집을 냈는데 오늘날에도 남미 전역에서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인데 그는 스페인 사람으로 1898년에 태어나서 스페인 내전 중에 친구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잡혀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그게 1936년이니까 38살 때 일입니다. 사실 저는 오래 전에 정현종 교수의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로르카 시 여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로르카의 진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정현종 교수의 로르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정말 좋은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르카의 시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강렬한 정서적 순간들의 응축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 그리고 그 이미지들의 강렬함은 마치 씨가 과육에 감싸여 있듯이 긴장되고 불가사의한 고요에 싸여 있다. 그러면서 그 고요한 공기는 또한 이미지들의 모태(시인의 내면의 공간)를 슬쩍 열어 보이며 모든 아름다운 이미지의 모태는 고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실제로 로르카의 시 ’메아리‘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새벽 꽃이 벌써/자기를/열었다/(기억하는가/오후의 깊이를?)//달의 감송(甘松)이 내뿜는다/그 찬 냄새를/(기억하는가/8월의 긴 눈짓을?)’

모든 꽃은 시간의 깊이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새벽 꽃의 본질입니다. ‘시인은 이 꽃이라는 암호에서 말해진 메아리를 타고 어느덧 “오후의 깊이” 속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 새벽 꽃의 메아리인 오후는 ‘깊은 오후’로 꽃핀다.‘ 다시 말해 시인은 사물의 암호를 읽는 사람입니다. 로르카의 서정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입니다. 정현종 교수는 로르카를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시의 원천은 사물에 대한 꿈꾸기이며 사물의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원동력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메타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살면서 정신적 피폐함을 느끼면 어린 시절로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시는 그러한 시원을 향한 그리움이라는 것입니다. 시는 현대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경이원지(敬而遠之) 당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만 시는 우리의 정신을 승화(昇華)시킴으로서 우리를 지친 삶에서 회복시켜 생기의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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