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제의 밤-
인물대학교의 가을 축제는 매년 이맘때면 캠퍼스 전체를 들썩이게 하는 거대한 잔치였다.
중앙 잔디밭에는 각 학과와 동아리에서 준비한 부스들이 형형색색의 조명 아래 빼곡히 들어섰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밴드 음악과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채웠다.
컴퓨터정보과 2학년 나오직은 친구 오지랖과 함께 축제의 열기 속을 거닐고 있었다.
나오직은 이름처럼 우직하고 한결같은 성격으로,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끈기 있게 밀어붙이는 타입이었다.
반면 오지랖은 이름 그대로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며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붙임성 좋고 유쾌한 친구였다. 둘은 성격은 달랐지만, 죽이 잘 맞는 단짝이었다.
"야, 나오직! 저기 간호학과 부스 봐라. 술 먹기 대회 한대! 작년에 우리 과 선배들이 간호학과한테 깨졌던 거 기억나냐? 이번엔 우리가 복수해야지!"
오지랖이 나오직의 어깨를 툭 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오직은 술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맥주 한두 잔만 마셔도 얼굴이 금세 붉어지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체질이었다.
하지만 오지랖의 성화에 못 이겨, 그리고 축제의 분위기에 휩쓸려 간호학과 부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이미 술 먹기 대회를 구경하려는 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술 먹기 대회가 한창이었다.
참가자들은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환호하는 관중들 앞에서 빠르게 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나오직은 별생각 없이 무대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무대 중앙에 서 있는 한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다른 참가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에 갸름한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특히 묘하게 도도해 보이는 눈빛은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능숙하고 거침없이 맥주잔을 비워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나오직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와, 쟤 봐라. 간호학과 신입생 김사랑이래. 소문 자자하더라. 얼굴도 예쁜데 술도 엄청 잘 마신다고. 벌써부터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서 여신으로 불린다던데?"
오지랖이 옆에서 나오직의 팔꿈치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나오직의 귀에는 오지랖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김사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잔을 시원하게 비워내고 우승을 차지하자,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김사랑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나오직은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존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나오직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는 그날 밤, 잠 못 이루며 김사랑의 잔상을 쫓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녀의 미소와 도도한 눈빛이 계속해서 아른거렸다.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오지랖은 나오직의 평소답지 않은 멍한 표정과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눈치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나오직이 축제 분위기에 취해 잠시 넋을 놓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오직의 마음속에는 이미 김사랑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잉크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축제의 밤은 그렇게 한 남자의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짝사랑을 시작하는 서막이 되었다.
나오직은 김사랑이라는 이름만 되뇌며,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깊은 상념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