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
'대통령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은 '나는 말하듯이 쓴다'에서 자신은 글쓰기로 세상을 보고 소통한다고 했다. 나는 보드게임 하는 과정을 보면서 세상을 본다. 아니 세상이 보인다. 산을 타면서도 인생은 등산과 같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보드게임 속에 모든 인생이 있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
이번에 초등학생들과 '블로커스'를 했다. 블로커스는 정사각형의 변끼리 맞닿게 이어붙이 폴리오미노 조각으로 게임판에 자신의 영역을 차지하는 게임이다. 폴리오미노 중에 정사각형 1개부터 5개까지 만들 수 있는 건 21개. 각기 다른 모양의 블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아이들에게 확인시켰다.
이제 게임 시작이다. 처음엔 자신의 블록 1개를 들어 보드게임 판 한 모서리에 놓아야 한다. 다음부터 자신의 블록을 놓을 때는 기존에 놓은 블록과 연결되어야 한다. 연결이라는 의미는 꼭짓점만 닿아야 한다. 변끼리 닿을 수가 없고, 따로 떨어져 놓을 수도 없다.
다른 색 블록들과는 닿아도 된다. 내 블록들은 꼭짓점만 잇고, 다른 블록들은 닿아도 되고 멀리 있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 블록을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한다.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면서 놓다가, 모든 사람이 블록을 놓을 곳을 찾지 못하면 게임이 종료된다. 이젠.... 게임판에 올라가지 못한 블록의 정사각형 개수를 센다. 그 조각이 가장 적게 남은 사람이 이긴다.
이런 단순한 게임에서 난 인간관계를 보았다. 사람은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에 따라 모든 것이 보인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든 일이 사랑으로 보이고, 슬픔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이 슬픔으로 보인다. 어느 날의 비는 단비였다가, 다른 날의 비는 내 마음과 함께 같이 울어주는 비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믿는 도끼(사람)에 아주 살짝 발등이 찍힌 일이 있었다. 처음 알았을 때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하다가 하루가 지나니, 순간순간 그 일이 생각났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니, '예전에도 그랬는데 아직도 속상해?'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면서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면 잊힐 것이다. 이런 경우는 시간이 약이다. 그러니 조금 기다려 보면 풀린다. 그냥 그 사람에 대한 신뢰만 조금 깨질 뿐이다.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는다.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으니 사람마다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블로커스 게임판을 보는데 꼭짓점만 닿는 사이가 적당한 사이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 처지와 블록들이 놓인 것에 비유해 버렸다. 적당한 위치, 아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로 친숙하지도 않은 사이. 정말 꼭짓점끼리 만 닿은 사이... 중요한 것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떨어질 수도 없는 사이. 참 개떡 같은 사이네 싶다. 하지만 어디 나뿐이겠는가? 우연한 기회에 다른 분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서운한 것 많지. 그냥 말해 무엇해하고 덮어버리는 거지."
"조금씩 다르니까 그냥 그 사람 성격이려니 해요. 속상해하지 말고."
"아직도 그런 일로 속상하고 서운해요? 난 진즉에 포기했어.
우리 친구가 아니에요. 그냥 같은 일을 하기 위해 만난 사람인거지"
이런 말을 들으니 속상했던 내가 가장 애정이 있었나 싶다. 사람은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니 내 생각이 다 옳은 것은 아닐 것이다. 미워하는 것도 애정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니 그 애정을 거둬 들일수밖에.
다시 게임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봤다. 다른 색깔의 블록들은 서로 닿아도 되고, 멀리 떨어져도 된다. 어떻게 놓이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 모르는 관계이니 믿지도 않을 것이고 스쳐 지나간들 언제 만났는지 기억이나 날까? 같은 색깔끼리는 꼭 꼭짓점이 서로 이어져 있어야 한다. 한 곳만 이어졌을 수도 있고 여러 곳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서로 모인 이유가 한 가지일 수도 두 가지 일수도 있다. 그 관계에 알맞은 거리일 것이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너무 가까워서 자세히 보이지 않은 적당한 거리. 가까워서 보이는 안 좋은 점을, 멀미 볼 때는 눈에 띄는 장점만 보인다. 예쁜 점만 보인다. 이제 인간관계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사이는 이렇게 꼭짓점만 닿도록 유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