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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게 Feb 04. 2022

또 한 번 명절은 가고

명절이 떡 버티고 있어서 신년벽두 신고식을 치르고 나니 어느새 한 해의 12분의 1이 지나갔다.

무사히 한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후련하기도 하고 상차림에 돈이 들어갔다고는 해도 당분간은 음식 걱정하지 않을 만큼 냉장고가 채워져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명절은 집약적인 노동이 수반되는 것

이상으로 심리적인 피로감이 참 큰 것 같다. 항상 이때쯤이면 좀 다르게 명절을 보내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해진다. 대통령 후보의 가상대결 여론조사만 하지 말고 명절 문화가 변해야 한다는 것에 국민들이 얼마나 공감하는지도 조사해서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보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     


결혼을 하고 나서 2주일 후가 바로 설날이었다. 시댁에서 보낸 첫 명절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5살 꼬마도 남자라는 이유로 명절 음식이 가득한 풍요로운 밥상에 합류하는데 여자들은 80세가 훨씬 넘은 시할머니를 위시해서 방바닥에다 그릇을 놓고  숟가락으로만 떡국을 먹었다. 명절음식은 커녕 김치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아예 젓가락도 없고 그것을 불평하는 사람도 없고 여자들의 초라한 식사를 미안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마치 난리통에 구호 식량 얻어먹는 행색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하기 힘들거 같다 . “여성 상위시대”란 여자가 밥상 위에서 밥을 먹게 된 시대라는 말이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방바닥에 밥그릇을 놓고 먹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마저도 차분히 앉아서 먹기 힘들게 풍요로운 밥상 쪽에서 음식을 리필해 달라는 주문이 계속 떨어지니 수시로 부엌을 들락거려야 했다. 나의 지위가 한없이 추락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명절 캠페인으로 “명절 교통사고 사망자 절반으로 줄이자”라는 표어가 있다. 의도는 알겠으나 고향을 오고 가는 중에 누군가는 죽는다는  전제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섬뜩하다. 이제는 고향에 갈 일이 없어졌지만 그 당시 나도 두 명의 아이들을 차속에서 우유를 먹이고 토해가며 평소 5시간이면 가는 거리가 10시간 이상으로 늘어나던 고단한 귀성길에 몸을 실었었다. 한날한시 동시 동작 조상을 모시느라 소중한 생명을 희생으로 치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시간차를 두면 불경스러운 것이 되기라도 하나. 마치 악어떼가 잠복하고 있는 강을 건너야 하는 얼룩말 무리처럼 누군가 희생되고야 마는 그 단체 행진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요즘 내 주변에 기존 명절의 형식을 아예 엎어버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한평생 지고 있던 거북이 등딱지를 아랫세대의 등허리에 묶어주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기까지 필시 오랜 갈등과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다. 조상에게 욕을 먹어도 내가 먹겠다는 각오로 용기를 내주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에 코로나가 한몫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반기고 볼 일이다.     

 

나도 작년에 며느리가 생겼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고 불공평한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딸에게도 며느리에게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명절에 가족모임을 하든, 조상님들 덕분에 여행을 가든, 누군가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과하여 곡소리 나게 하고, 폭설이 일어도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가차 없이 고속도로를 타게 하는 진을 빼는 명절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함께 준비하고 함께 쉬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명절의 새판이 짜이면 좋겠다는 소망이 간절하다.    

  

또 한 번 명절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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