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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게 Apr 19. 2022

불안과 행복의 밀당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 인생에 대입해 본 적은 별로 없는 거 같다. 마음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바탕색이 밝은 유채색은 아니다. 평화로운 상황에서도 안 좋은 상상을 먼저 하고 잘 될 거 같은 일에도 장밋빛 예측을 쉽사리 하지 못한다. 그러니 무채색 중에도 명도가 낮은 쪽이 아닐까 싶다.    

  

나는 태생부터 불안에 좀 예민한 아이였던 거 같다. 어린 시절 빈집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는 창문 아래 의자를 놓고 올라가 밖을 내다보며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나쁜 사람이 불쑥 들어올 것 같은 불안감, 그리고 어두컴컴한 구석 어디선가 갑자기 귀신이 튀어나올 것 만 같은 불안감에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몇 시간이고 서 있곤 했다.     


약속시간에 거의 늦지 않는다. 중요한 것을 두고 나와서 다시 들어갔다 나올 가능성과 길이 막히거나 지하철이 연착할 가능성을 계산하고 만약 초행길이라면 길을 헤맬 수 있는 가능성까지 고려해서 항상 여유를 두고 출발을 하기 때문에 30분이나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하는 일도 익숙하다.  

    

아이들이 수능을 보러 가는 날에는 계단으로 내려가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곤 했었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경험이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혼자도 아니었고 겨우 10분 정도였는데 중요한 날을 앞두고는 여지없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외출할 때는 가방 안에 여분의 마스크가 들어 있는지 확인을 한다. 마스크 끈이 끊어진 경험이 한 번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와 만날 약속이 있을 때는 두 개를 챙긴다.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해도 가능성을 끌어와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곤 한다.   

   

‘불안’은 미래 지향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인간은 불안에 예민한 속성으로 위험한 환경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수명을 늘려 왔다. 몇 만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은 점차 안전하게 진화해 왔으나 인간의 뇌는 진화하지 못한 채 아직도 동일한 불안 에너지를 쓰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불안의 정도는 구석기인들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언제 닥칠지 모를 맹수의 공격에 대비를 하고 변화하는 날씨에 대책을 세우면서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불안해했던 구석기인이 여전히 우리의 뇌와 몸속에 남아 충심 어린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최대한 불안해라. 그래야 살아남는다’     


태생적 불안과 가상 시뮬레이션까지 합세를 하니 크게 당황하거나 실수를 해서 민폐를 끼치는 일은 잘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은 나의 삶을 저명도 무채색으로 만드는 것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불안의 영역이 행복의 영역을 과하게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과 행복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끌어당기고 끌려가기도 하며 밀당을 하고 있다. 불안은 대체로 주도권을 잡는다.    

 

지금도 어디에나 위험은 있다. 팬데믹에, 전쟁에, 사건 사고에 인간은 여전히 수없이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아무리 위험하다고 한 들, 돌멩이를 들고 맹수들과 맞서야 했던 구석기시대만 할까.   

   

동네 공원에 꽃 잔치가 열렸다. 코로나도 불완전 종식이기는 하지만 끝이 보이는 것 같아 희망을 품게 한다. 거창하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불안한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으로 행복의 용적이 저절로  늘어난다면야 내 안에서 살고 있는 구석기인은  움켜 쥔 뗀석기 손의 것을 슬며시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모르겠다.

진짜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게 될지...

내려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불안하나를 더 얹게 될지는...    

 

무채색 흐림에 화사한 유채색 햇살이 기다려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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