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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May 22. 2022

타깃(Target)

조종실에서 보는 세상 1-4


Target
정확히 조준하라. 저 아래 반가운 나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2011년 글을 2022년에 다시 쓰다."




비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륙할 때 어떻게 조작 하나?” 혹은, “플레어를 어떻게 하나? (Flare: 소프트랜딩을 위해 강하 각을 줄이며 포물선 모양으로 활주로에 가볍게 닿도록 하는 조작)”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대답은 길어진다. 속도, 바람, 파워 컨트롤 이야기는 기본이고 심지어 탄젠트 값, 벡터 값까지 나오면서 어느 속도에서 기수를 1도 들면 얼마나 강하율이 줄어드는지를 계산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보통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난감하다. 나도 대답을 잘 못한다. 농담 반, 진담 반, 그냥 뻔한 대답을 한다. 그러나 사실 나만의 확실한 대답이 있다. 좀 창피하지만 이 기회에 용기 내어 한번 말해보겠다. 다시 한번 질문 큐.


“신기장은 플레어를 어떻게 합니까?”


“저는 비행기가 활주로 저기, 저… 기(풋 마커를 가리키며)에 내리게 하려고 조작할 뿐입니다.”



풋마커(Foot Marker)란 활주로 위에 발자국처럼 두 개의 직사각형 모양을 나란히 그려놓은 표식이다. 작은 공항에서는 활주로 끝에서 1,000 피트 지점에, 정식 명칭으로 '1,000 foot fixed distance marking'이라는 것을 그려 놓았고, ICAO(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국제 민간 항공 기구, UN 기구임) 규정을 적용하는 공항에서는 'Aiming point marking'이라고 하여 1,300~ 1,500 피트 지점에 이 표식을 그려놓는다. 마치 발자국 모양으로 생겨서 처음 비행을 배울 때 나는 그냥 ‘풋마커’라고 불렀다.


착륙할 때 조종사가 이 발자국 모양의 표식을 조준하여 활주로에 접근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조준점을 유지하면 실제로는 조준점에 착지하지 못하고 그전에 미리 바퀴가 닿아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강하율을 줄이지 못하여 하드랜딩을 하게 된다. 그래서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기가 부드럽게 활주로에 내리기 위해 "플레어"란 조작을 하는 것이다.  


나는 플레어를 할 때 이 마킹 위에 비행기의 뒷바퀴가 닿게 하기 위해 끝까지 조준점을 놓지 않으려 한다. 기수 자세와 엔진 파워를 조절하여 정확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 조준점에 접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풋마커는 나에게 활주로에 접근하는 조준점(Aiming Point) 뿐만 아니라 접지하는 목표점(Target Point)도 되는 것이다. 나처럼 정확한 접지 지점에 집착하는 조종사도 있고, 접지 구역 안에만 내릴 수 있다면 정확한 지점보다 부드러운 접지에 더 집중하는 조종사도 있다. 물론 나도 매 번 이 마킹 한가운데 정확히 접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보통은 플러스 마이너스 일이백 피트 안에 내린다. 어쩌다 보니 'Target', 바로 이것이 나의 착륙 요령이 되어버렸다.


비행기 무게, 무게 중심, 바람의 방향과 세기, 공기의 밀도, 온도, 공항 표고 등 매 번 착륙하는 조건이 다르지만 Target은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 있다. 그 타깃에 부드럽게 명중하기 위해 나를 단련시켜 왔다. 매번 환경과 조건이 다르므로 나의 조작도 다르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비슷해야 한다.


서론부터 너무 기술적인 소재를 꺼내버렸다. 사실 나는 테크니컬 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비행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자. 비행은 가슴 설레는 모험이다. 비행이 놀라운 경험이며 새로운 나의 모습에 흥분할 수 있는 과 같은 것이라면, 착륙은 현실로의 귀환이며 본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주로 위에 나의 Target은 과연 흔들림 없는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정말로 그곳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곳으로 돌아가는 나는 과연 행복한 것인가? 조금 혼란스럽지만, 일단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1996년 6월 16일. 그날 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리버모어(Livermore)’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이곳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본사를 둔 ‘시에라 아카데미’라는 비행학교가 대한항공의 위탁을 받아 나에게 비행훈련을 시켰던 곳이다. 리버모어에는 두 개의 작은 활주로가 평행으로 놓인 작은 공항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기초 비행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업용 비행 면장을 따기 위한 최종 심사를 받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공항 사무실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 심사를 무사히 마치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한국에 돌아가도 제주도에서 고성능 프로펠러 항공기와 제트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 과정을 무사히 마쳐도 정식 부기장이 되려면 훈련은 끝도 없이 계속된다. 아직 멀고 멀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나는 마음이 들떠 있었다. 9개월간 미국에 있는 동안 세상에 나온, 아직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한 내 첫아기를 처음으로 만날 수 있기 떄문이었다.  


그런 기대감 탓인지 당시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담당 교관도 그걸 확인하고 나를 제일 먼저 심사대상으로 추천했으며, 교관 그룹장인 데이비드는 마지막으로 1시간 50분 동안 함께 비행한 후 엄지척을 보이며 “기똥차게 잘했어.”라고 과장된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거대한 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악명 높은 담당 심사관 ‘제프 하이츠버그’였다.


그는 땅딸한 몸매에 블론드 머리를 가진 백인이었는데, 당시 우리들에게 제일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구술심사에서는 항상 그가 원하는 답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답해야 했기에 소위 말하는 ‘삼국지 족보’가 선배들로부터 대대로 전수되고 있었다. 비행 중에 학생이 작은 실수를 하게 되면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심한 옐링(yelling)을 쏟아붓는데 마음 약한 사람은 이것을 견뎌내기 쉽지 않다. 소리 지를 때 얼굴이 하도 발갛게 달아올라 우리는 그의 별명을 ‘적두(赤頭)’라고 불렀다.


나는 이미 두 번의 심사를 제프로부터 받았었다. 다행히 두 번 모두 큰 실수 없이 그의 얼굴이 핑크빛으로 변하는 정도에서 잘 방어했다. 그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 동료 조종사들도 꽤 여럿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날 검붉은색으로 변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을 목격하고 만다. 허허.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다시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보자.

 

심사받을 때 사용한 비행기는 ‘비치크래프트사’에서 만든 ‘BE-76’이라는 기종이었다. 쌍발 왕복 엔진을 가진 작은 5인승 비행기였다. 심사관이 오기 전에 꼼꼼히 비행기를 둘러보고 만져보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도 했다. 오늘 잘 날아주면 며칠 후 기분 좋게 아기를 볼 수 있다고 ‘N69276’이라는 이름을 가진 낡은 비행기에게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이윽고 제프가 도착했다. 멀리서 보았는데 모닝커피를 마시며 교관 그룹장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잠시 후 나를 힐끗 처다 보았다. 교관 그룹장도 나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는다. 후후...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심사는 구술심사로 시작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알다시피 우리는 이미 삼국지를 달달 외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한 시간여 동안 지루하게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데, 긴장이 풀렸는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비행기의 비상조치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그만 삼국지 정답에 양념을 조금 쳐서 내 생각을 얘기해 버린 것이다. 제프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변하더니 다시 묻는다.


“왜 그런 불필요한 말을 하는 건데?”


“아. 미안합니다. 단지 제 생각에는……”


“너의 생각은 너 만큼이나 재미없는 네 일기장에 써!! 비행기의 ‘비’자도 모르는 새파란 놈이 미합중국 FAA 면장 심사 중에 어디 감히 터무니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거야?! 내가 너 같은 놈이랑 토론이나 하는 그런 상대로 보이냐?!!!”


“……”


입이 떡 벌어졌다. 바로 이런 거구나. 바로 이런 기분이었어. 나는 앵무새처럼 모범답안을 읊는 모양으로 얼른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면 제프의 얼굴도 백색으로 돌아오고 이글거리던 초록색 눈동자도 온화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실수는 또다시 이어졌다.

 

다음 질문은 오늘 비행의 무게 중심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비행기의 연료량, 사람, 짐의 무게와 탑재 위치를 공식에 대입하여 계산하는 것인데, 이 비행기는 운송용 항공기도 아니고 승객도 없이 심사관과 단둘이 가방 하나씩 들고 타는 비행이라 심사 비행마다 거의 일정한 수치가 나온다. 그러니까 계산하는 흉내만 내도 되는, 그냥 거저먹는 질문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마 제프도 내가 실수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가방을 챙겨 비행하러 나갈 준비를 하는 제프에게 건네준 나의 답안지에는 그야말로 황당한 수치가 적혀있었다. 내가 계산한 값은 비행기 무게중심이 항공기의 코(Nose)보다 앞에 있었다. 아무리 기수를 들어도 그냥 바로 기수가 꼬꾸라지는 값이었다. 공식에 숫자를 잘못 대입한 것이었다. 답안지를 보는 제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는 곧 내 숫자가 뜻하는 바를 깨닿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직감했다. 이를 어쩌나, 얼른 답안지를 빼앗아 다시 계산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에고에고… 왜 난 검산도 한 번 안 해 봤냐고!!


제프는 너무 황당해서인지 곧바로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이런 답안을 제출한 코리안 에어 학생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갸우뚱하면서 돋보기를 꺼내 들더니 깔끔하게 계산해놓은 웨이트 앤 밸런스 시트(Weight & Balance Sheet)를 다시 한번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의 숨이 서서히 가빠지기 시작했다. 얼굴도 빠른 속도로 붉게 달아오른다.  


“오우풀(Awful)!! 오우풀!! CG(무게중심)가 코앞에 있냐? 너 비행기 심사 보러 온 놈 맞아?? 넌 페일(Fail)이야! 페일! 날 아주 화나게 했어. 너 같은 놈을 감히 추천해서 심사를 올리다니! 데이비드, 데이비드 어디 있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 영어실력이 그리 훌륭하지 않지만 그의 말이 따박따박 귓속에 박혔다. 교관 그룹장인 데이비드가 달려왔다. 데이비드도 덩달아 벌을 서야 할 것 같았다.


“오 마이 굳네스(Oh my goodness)! 내가 이걸로 심사비는 받지만, 이런 놈을 심사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여기 대한항공 조종 학생들 오럴 테스트에서 떨어지는 학생 있었니? 아마 이놈이 처음일 거야."


교관 그룹장에게 욕바가지를 제대로 한 번 퍼붓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내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페일(Fail)이야! 페일! 내가 커널로에게 죄다 말할 거다. 너 각오해! ” 커널로는 당시 회사에서 파견한 조종학생 감독관이었다. 노씨 성을 가진 그가 육군 대령 출신이어서 미국 교관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다.

 

멀리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이륙도 못해보고 구술심사에서 실격하는 최초의 대한항공 조종훈련생이 되어버렸다. 물론 재심을 받을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지겠지만, 어쨌든 이것은 나의 기록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더구나 비행을 못해서도 아닌 구술심사를 통과 못한, 그러니까 기본자세가 안된 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잠시 후 닥쳐올 커널로의 공포스러운 귀싸대기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서울에 있는 아내와 아기를 생각하니 말못할 슬픔이 밀려왔다.


나는 공항 사무실 앞마당의 이름 모를 오래된 나무에서 한숨을 쏟아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커널로, 교관 그룹 장, 내 담당 교관, 그리고 제프가 뭔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제프는 아직도 얼굴이 빨갰다.



위로해주는 동기 옆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는데, 어느새 제프가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플라이트 백을 들고 말이다. 나는 얼른 담배를 끄고 일어서서 열중쉬어 자세로 섰다. 제프가 내 앞에 가까이 오더니,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내 코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비행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지 한번 보자! 빨리 따라와!”

 

“옛 설(Yes sir)!”


나는 우렁차게 대답하고 얼른 비행 가방을 챙겼다. 동기들은 주먹을 쥐어 보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비행을 하게 되어 다행스러웠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하얀 얼굴로 이륙해도 힘든 마당에 이미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갛게 달아 오른 제프를 따라 비행기에 오르는 나의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같았다. 비행기에 올라 엔진 시동을 걸자 제프가 말했다.

 

“넌 이미 페일(Fail)이야. 너네 회사가 비싼 심사비를 지불했으니 그냥 비행기 한 번 타게 해주는 거야.”

 

다시 한번 “옛 썰”을 외쳤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일단 최선을 다해 비행을 잘해야 다음번 재심사가 그나마 편해질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오늘 비행을 진짜 기똥차게 한다면 심사관의 마음이 바뀔지도. 나는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리버모어 공항 활주로 25를 힘차게 이륙했다.




공중에서 몇 가지 기본 과목을 수행했다. 제프는 크게 소리치지 않았으나 양손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여전히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굴도 여전히 붉었다. 과목들을 수행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요구하는데, 일부러 그러는지 똑바로 정확하게 지시하지 않고 입 안에서 말을 웅얼거렸다. 안 그래도 영어가 약한데 시끄러운 프로펠러 소음에 묻혀 그의 말이 잘 안 들렸다. 몇 번 “세이 어게인(Say Again)”을 반복하자 제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너 비행하는 것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데, 영어도 잘 못 알아먹냐? 그런데 건방지게 내 말을 주의 깊게 안 듣잖아!" 원어대로 써보자면 대충 이런 말도 했다. "유 돈 리슨 투미(You don’t listen to me.) 허(Huh)? 킵 요 더미 이얼즈 오픈(Keep your dummy ears open)! 유 노 왓 암 새잉(You know what I’m saying?)? 오우풀(Awful)!!"

 

이래저래 욕도 먹고, 조롱도 받으며 공중에서 하는 기동(Maneuver) 과목들을 끝냈다. 이제는 가까이 있는 스탁턴(Stockton) 공항에서 한 번의 계기 접근을 실시하고, 리버모어로 돌아가 장주 비행(활주로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패턴을 그리며 착륙과 이륙을 이어서 계속하는 것)으로 두 번의 착륙을 수행하면 된다. 예상 시나리오대로 제프가 요구했다.


“자, 이제 스탁턴으로 가서 ILS 접근하자!”


“옛 설!”


나는 일단 스탁턴을 향해 비행기의 기수를 돌려놓고 오클랜드 관제소와 레이더 컨택을 실시한 다음, ILS접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ILS: Instrument Landing System의 약자로서 항공기를 유도하는 VHF 시그널을 따라 활주로에 접근하여 착륙하는 정밀 착륙 절차이다.)



그런데... 그런데...! ILS 절차가 그려진 계기 접근 차트를 꺼내려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런 X 됐다!! 정말 오우풀(Awful)이다! 어쩌면 좋아?!’


어젯밤에 공부한답시고 ILS 차트를 책상 위에 꺼내놓고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계기접근 및 착륙 시 반드시 레퍼런스 차트를 갖고 있어야 접근을 수행할 수 있다.) 책상 위에 차트를 꺼내 놓은 기억은 생생한데, 그것을 다시 챙겨 넣은 기억이 없다. 미친 듯이 차트를 뒤지고 있으니 제프가 힐끗 쳐다본다. 나도 힐끗 눈치를 보았다. 그의 표정에 '설마, 믿을 수 없다(No way, I can't believe it)'라고 쓰여있었다. 눈치를 살피며 계속 차트 폴더를 뒤적이고 있으니 그의 호기심 가득한 붉은 머리가 나에게 점점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인터폰을 타고 흐르는 그의 숨소리가 점점 거세지자 다급해진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심사관님, ILS대신 VOR접근을 해도 될까요?(Mr. Heizburg, can I shoot VOR approach instead?)”


“뭐?! 너 조종간에서 손 떼! 내 비행기에서 손 떼라고!!! (What!? I have control. I said, take your hands off my airplane!!!)”


조종간을 잡은 제프는 내 턱밑까지 얼굴을 들이대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한 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레이 뱅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레이저를 뿜어대고 있었다. 타오르는 그의 얼굴은 이제 검붉게 잘 익은 단 팥 앙꼬 색이 되었다. 갑자기 얼굴을 휙 돌리더니 앞을 쳐다보며 갑자기 날개를 옆으로 휙 눕혔다. 엔진 파워를 쭈욱 올리고 오른쪽으로 날개를 45도 눕히더니 스팁 턴(Steep Turn: 45도 이상 깊은 경사각을 주고 급선회하며 뱅글뱅글 도는 것. 보통 비행보다 G하중이 많이 걸린다)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오우풀과는 레벨이 다른, 보통 학생들이 들어보기 힘든 단어를 마치 용트림하듯 분출해낸다.


“Fxxxxxxxx………………………xxxxxK!!!”


“댐 잇(Damn it)! ILS 차트를 안 가져왔다고? 너는 건방지기만 하고, 머릿속에 든 게 하나도 없어. 비행기 무게중심도 대충 엉터리로 구했어. 얼마나 자신만만하길래 그러는지 궁금해서 비행기 태워보니 이거 뭐 비행도 별 볼 일 없어. 그런데 뭐? 뭐라고? 차트도 안 가져왔다고??? 오 마이 굳네스!!!(Oh my goodness!!!)”


시원했다. 시원하게 샤워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욕 세례는 그치지 않았다.


“너 나 약 올리려고 오늘 심사받는 거니? 왜 날 괴롭히는 거야? 내 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어떻게 감히 심사 날 차트를 안 가져올 수 있어? 오우풀!! 쏘(So).. 쏘.. 오우풀! 이디엇(Idiot)! 쏘 이디어엇...!”


스팁 턴을 무려 세 바퀴나 돌았다. 스팁 턴과 욕 세례로 정신이 혼미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윽고 제프가 스팁 턴 마치고 수평을 잡더니 말했다.


“백 투 리버모어! (Back to Livermore!)”


심사 종료라는 의미이다. 보통은 심사 도중에 학생들이 이 말을 들으면 제프의 팔뚝을 붙잡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하지만 난 그럴만한 염치가 없었다. 몇 분을 정적 속에 비행하더니 제프가 입을 열었다. 분노를 누르고 조용히 말을 걸었지만 숨소리는 여전히 거칠었다.

 

“너 차트 왜 안 가져왔니?”


“어제 밤에 공부하느라 책상에 꺼내놓고 잊어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바보 같은... 에휴...” 제프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얼굴은 여전히 앙꼬 색이다. 한참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조종간을 넘겨주며 말했다.

 

“다시 스탁턴으로 가자. 가서 VOR 접근해봐라. 유 해브 컨트롤.”


“예……”


눈물이 고였다. 선글라스를 들어 올려 눈을 비비며 다짐했다. 정말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심사에 합격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아예 접어버렸다. 실낱 같은 희망도 염치없는 욕심일 뿐이었다. 나 같은 놈은 페일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단지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끝까지 비행을 계속하게 해 준 제프가 고마웠고, 미안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VOR 접근은 ILS와 같은 착륙 전용 유도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로의 위치나 공항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항법 시설인 VOR을 사용해서 활주로에 접근하는 절차이다. 보통 ‘비정밀 접근’이라 부르며 ILS와 같은 정밀접근에 비해 정교하지 않은 만큼 절차도 까다롭다. 초보 비행 훈련생에게는 어쩌면 ILS보다 더 어려운 접근이었다. 나는 심사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VOR접근에 대해 준비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VOR 접근을 해 본 지도 오래되었다. 무척 긴장되었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었다. 이제 제프의 옐링(Yelling)은 두렵지 않았다. 내가 미안했다. 어차피 오늘은 불합격이지만, 그래도 비행을 잘해서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나는 배운 대로 하나씩 침착하게 절차를 밟아 VOR 접근을 완수했다.


이제 리버모어로 돌아간다. 오늘 체크 라이드(심사 비행)는 엉망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푸근해졌다. 하지만 온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제프는 아직도 마음속에 한치의 여유도 내주지 않았다. 비행 장주를 돌아 한 번의 터치 엔고(Touch and Go: 착륙 접지 직후 다시 파워를 넣어 이륙하는 것)를 수행하자, 제프가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넌 오늘 불합격이야.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옛 설.”


“그래. 이제 마지막 착륙이다. 너는 오늘 분명히 페일이야. 그런데... 혹시라도... 아마도 넌 못하겠지만, 이번에 착륙할 때 저기 1,000 풋마커 정 가운데 정확히 터치 다운(Touch down) 하면 나도 한 번 고려해볼 수도 있어.”


“옛 썰.”


내 대답은 힘이 없었다. 그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모르겠다. 괜히 떡밥 하나 던져놓고 더 야단을 치려는 걸까? 1,000 피트에 찍지 못하면 날 비웃고 조롱하려고? 그래서 내 기를 더 죽이려고? 1,000 풋마커를 조준해서 활주로에 접근하지만 정확히 그곳에 접지하려고 노력한 적은 없었다. 사실 접지 구역 안에만 안전하게 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강하 율을 줄여가면서 안전하고 부드럽게 착륙하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의 요구는 생소했지만, 어디 한 번 해보자는 강한 욕구가 생겼다. 정교하고, 정확하게 컨트롤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내가 조종하는 비행기가 내 몸처럼 움직인다면, 내가 원하는 위치에 착륙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선회를 하여 활주로를 향한 파이널 코스에 정대하자 풋마커가 눈앞에 선명히 들어왔다. 저 발자국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야 한다. 풋마커를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자니, 경험해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저것은 나의 Target이다. 나는 항상 변함없는 저 자리에 돌아간다. 짜릿한 모험은 모두 끝났으며 원래의 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갈 때 변함없는 목표점이 없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무얼 보고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저기 보이는 하얀 풋마커는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고 나의 본연이다. 인간은 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졌지만 인간 본래의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꿈을 꾸며 도전하고 있지만 이제 모험을 마치고 돌아갈 시간이다. 나는 오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포개어 입맞춤할 것이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성공을 한다면, 나는 언제든 방황하지 않고 원래의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한 번 해보는 거야. 내 본능과 희망을 모두 동원해보는 거야. 만약 이걸 해낸다면 이제 나는 정말로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는 거야!’


마지막 접근은 평화로웠다. 3도 강하 각을 나타내 주는 불빛을 확인하며 서서히 내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요란한 프로펠러 굉음은 나의 심장 박동이었다. 조종간을 잡고 있지만, 두 팔이 날개가 되어 헤엄치듯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활주로 끝을 50피트 높이로 통과하자 서서히 플레어 준비를 한다. 기수를 약간 들어 올리자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풋마커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타깃을 바라보며 엔진 파워와 기수를 조절하여 정확히 풋마커의 정 중앙에 내려앉도록 해야 한다. 포물선의 끝이 정확히, 그리고 부드럽게 저곳에 닿도록 하려면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한 번 혹은 두 번의 짧은 조작으로 포물선을 완성해야 한다.


‘저기 내려야 돼! 바로 저기……!’


복잡한 계산이나 논리적 판단은 없었다. 그저 본능으로 느끼고 조작했다. 차를 운전할 때도, 혹은 두 발로 뛸 때도 집중해서 힘조절만 잘하면 원하는 지점에 정지할 수 있지 않은가? 날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좀 더 복잡한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나는 지금 날고 있다. 날 줄 안다면 원하는 곳에 내릴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풋마커에 다가서자 조심스레 파워를 줄였다. 파워를 줄이는 것이 약간 늦은 것 같았다. 비행기가 원하는 만큼 떨어지지 았았다. 조금 높은 것 같아 기수를 약간 내렸다. 그러자 비행기에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에너지가 너무 많아 평소처럼 플레어를 하면 타깃을 지나칠 것 같았다. 이제 방법은 한 가지였다. 평소보다 더 깊게 강하하다가 접지 직전 한번에 기수를 들어 강하율을 급하게 줄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비록 에너지가 충분히 줄어들지 않아도 소프트하게 원하는 위치에 터치 다운할 수 있다는 ‘감’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비행기는 드디어 풋마커 위에 올라섰고 나는 숨을 죽인 채 마지막 당김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엉덩이 아래가 짜릿했다. 평소보다 깊은 강하율이었지만 곧 지면에 다 왔다는 것이 동물적으로 느껴졌다. 풋마커의 끝자락을 통과하자 숨을 죽인 채 기수를 살짝 들었다.


‘그래. 바로 여기야......’


그때 내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 같았다.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모를 따스한 평화가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이 너무 고맙고 행복했다.


나는 내 얼굴을 큰 거울 위에 비춰보고 있다. 거울 속에 내가 불안해 보였다. 분명 내 얼굴인데 아주 어색하다. 분명 내 모습인데 오랜 친구를 만난 것 처럼 반가웠다. 그래! 이게 바로 나야.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거울 속에 안절부절하던 내 얼굴이 드디어 환하게 웃는다. 나도 따라 웃었다.


‘지수야, 너 아주 오랜만이다!‘


버저비터의 슛은 손을 떠나 림을 향해 큰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18홀 역전 버디 퍼팅은 울퉁불퉁한 그린 위를 주정뱅이처럼 굴러가고 있다. 그리운 ‘나’를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찾지 못해 방황할 것인가?

 

“ 쓱~~ 퉁”


비행기의 낡은 바퀴가 활주로에 부드럽게 닿았다. 그리고 그곳은, 활주로 1,000 풋마커의 한가운데였다.


기뻤다. 너무 기뻤다. 제프가 요구한 것을 성공했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으로 날개를 퍼덕거리며 '제대로 날았다’는 생각에 가슴 벅찬 희열을 느꼈다.





비행이 끝난 후 다시 나무 아래에서 멀리 제프와 커널로 그리고 데이비드가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사 결과는 아마도 불합격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욕 세례를 퍼분 제프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진짜 나는 법을 가르쳐준 것 같아 고마웠다.


그날 나는 초보 조종사로서 비행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았다. 제프가 그것을 도와주었다. 비행의 의미는 ‘나를 찾는 것’이었으며 착륙은 ‘나에게, 원래의 내 모습으로,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의 Target 은 거울에 비친 내 솔직한 모습이었으며, 나를 찾을 수 있다면 언제든 다시 아름다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제프가 나를 바라보며 손짓을 했다.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넌 이미 오럴에서 페일이었고, 차트를 준비하지 않고 비행을 나선 것 역시 불합격 사유가 된다. 원칙적으로 너는 오늘 두 번 페일 된 거다.”


“예썰…”


“그런데 미스터 신, 너 알아? 나는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매우 관대한 사람이야. 너는 나와 비행한 것을 행운으로 알아야 해.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붙여주기로 했거든.”


“......”


“넌 내 심사에 패스했다. 비록 준비 과정에서 실수를 했지만, 너의 비행 기량과 집중력을 확인했다. 축하한다는 인사는 하지 않겠다. 너는 에어라인의 조종사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더 노력하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훌륭한 에어라인의 조종사가 될 수 없다. 알겠지?”


바보같이 눈물이 나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제프가 떠나자 교관 그룹장인 데이비드가 내 팔을 덥석 잡더니 호기심에 찬 얼굴을 들이대며 말을 걸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미안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갔는지, 차트도 안 가져가고 계산도 엉터리로 해서...”


“아니, 그게 아니고... 차트도 안 가지고 갔는데 어떻게 합격을 했냐고? 어떻게 마음을 돌려세운거야? 제프가 웬일이지?? 세상에 오래 살고 볼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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