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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수 Sep 03. 2022

국제선 비행기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국적은?

[질문 있어요! #28] 잡다한 비행이야기 일문다답


이런 건 변호사나 판사에게 물어봐야지 왜 조종사한테 물어보나. 하지만 나도 한 때 법조인의 꿈을 가졌던 사람이라 이런 류의 법 논리에 호기심이 생긴다. 아는 대로 이야기해 볼 테니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친절하게 고쳐주시길. 큐.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국적법은 '속인주의'를 채택한다. 부모가 한국사람이면 아기가 어디서 태어나든 한국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형법은 기본적으로 '속지주의'를 적용한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국내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동시에 '속인주의'도 적용된다. 그래서 한국인이 외국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국내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사람의 국적과 법 적용의 상관관계는 꽤 복잡하다.


국적을 부여할 때도 어느 나라는 속인주의를, 어느 나라는 속지주의를, 또 어떤 나라에서는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를 병행하여 적용한다. 그렇다 보니 국제선 비행기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여러 나라의 법들이 얽히고설켜 족보가 꼬여버린다. 어떤 아기는 한꺼번에 두세 개의 국적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어떤 아기는 아무 국적도 없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도 있겠다.


'핏줄'이 중요한 한국은 국적을 부여할 때 속인주의를 채택하므로, 비행기에서 한국인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이 된다. 외국 국적의 산모가 아기를 낳으면 그 비행기가 한국 비행기던, 서울 상공에서 낳았던 한국 국적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진다. 물론,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혼인신고를 한 상태라면 그 아기는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비행기가 미국 영공에서 비행 중이었다면? 속지주의를 채택하는 미국 땅에서 태어났으므로 산모의 국적과 상관없이 그 아기는 미국 국적을 얻을 수 있다. 산모가 한국인이라면 그 아기는 미국과 한국 두 개의 국적을 모두 얻게 되어 이중국적이 되는 것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하는 캐나다나 미국에서는 자국의 영토, 영공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의 국적과 상관없이 자국의 시민권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인이 다른 나라 영토에서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되나? 속지주의를 채택한다고 해서 미국 밖에서 태어난 미국인의 아기를 미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특히 공해상에서 태어나면 어떤 나라의 국적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미국은 속지주의와 함께 속인주의도 동시에 적용한다. 복잡한 요건들을 충족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미국 국적의 부모가 외국에서, 혹은 공해상에서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는 당연히 미국 국적을 가질 수 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Karen Warfel님의 이미지입니다.


'기국주의'라는 말도 있는데, 그 비행기가 어디를 날든 그 비행기가 등록된 나라의 영토로 간주하는 개념이다. 점점 복잡해지는데, 법적으로 판정하기 골치 아픈 경우가 많다 보니 이런저런 개념을 도입하는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한 우간다 여성이 미국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영공을 통과하는 도중 아기를 낳았더니 우간다, 캐나다, 미국 이렇게 세 개의 국적을 동시에 얻게 되었다고 한다. 우간다는 속인주의, 캐나다는 속지주의, 미국은 기국주의를 채택한 것 같은데, 흔하지 않은 경우겠지만 법조인도 아닌 보통사람들이 이런 사례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국제적으로 조세나 범죄 등은 국가 간 조약이 잘 체결되어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국적법이나 이민법은 국가 간의 협약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잘 몰라도 내가 받은 느낌은, 국적이나 이민에 대해서는 각 나라들이 국제 공조보다는 독자적이고 폐쇄적인 정책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오래전에 여권이 무려 5개나 있는 사람도 본 적이 있는데, 제이슨 본 같아서 조금 부러웠다.     


기국주의가 적용되는 경우는 주로 '기내 범죄'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형법을 적용할 때 기국주의를 채택하는데, 비행기 기내를 비행기가 등록된 국가의 영토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공해상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한국의 법정에 서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형법상 기국주의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속지주의, 속인주의를 모두 적용하므로 한국사람이 외국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공해상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형법을 피해 갈 수 없다. 물론 그 비행기의 등록 국가도 기국주의를 채택할 테니 그 나라의 형법에도 저촉될 것이다. 범인은 양 국가의 범죄인 인도 조약 등 관련 외교 협약에 의해 어느나라의 법정에 설 것인지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공해상에서 나쁜 짓을 하면 벌주려는 나라만 더 많아질 뿐이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Klaus Hausmann님의 이미지입니다.

기국주의를 채택할  '기국'이란  비행기가 등록된 '항공기 등록국' 뜻한다. 쉽게 말해  비행기가 어느 나라 번호판을 달고 있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행정적인 책임을 따질  비행기와 관련된 국가는 여럿이다. 항공기 제조국, 항공기 조립국, 항공기 소유국, 항공기 등록국, 항공기 운영국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설계해서 조립하고, 이것을 미국 사람이 사서 미국 정부에 등록하고,  미국에 본사가 있고 미국 법인세를 내는 미국 회사가 빌려서 운영하면 위의 국가들은 모두 '미국' 된다. 하지만 비행기가 국경을 넘어 다니고, 국제적으로 비즈니스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최소한 두세  국가가 동시에 연관된다. 이때 기국주의의 '기국'이란 그중 '항공기 등록국' 해당되며,   비행기의 국적이 된다.




글을 마치려 보니 근본적인 의문점이 생겼다. 도대체 산모가 비행기에서 아기를 낳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걸까? 국내 항공사들은 임신 37주 이상 임산부의 탑승을 거부한다. 위험하기 때문에 태우지 않는다. 하지만 32주에서 36주 사이의 임산부는 의사의 진단서를 제출하고 서약서를 쓰면 비행기에 탈 수 있다고 한다. 32주 이전이면 제한이 없다. 32주에서 36주 사이의 임산부가 아기를 낳으면 8삭 둥이가 되는 것인데, 흔하지는 않아도 주변에 8삭 둥이가 가끔 있지 않나?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몇 가지 문서만 작성하면 비행기에 오를 수 있다고 하니, 비행기에서 출산할 확률도 생각보다 높지 않겠나? 7삭 둥이, 8삭 둥이는 태어나서 호흡이 불안하여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 경우가 많을 텐데, 기압도 낮고 의료 장비도 열악한 비행기에서 태어나면 어쩌란 말인가? 보통의 임산부라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기를 타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꼭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정도 있을 수 있겠지.


한때 원정출산이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미국에서 아기를 낳아 미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였다. 37주 이전의 많은 임산부가 진단서와 서약서를 제출하고 비행기에 올랐을 것이다. 37주가 넘는 만삭의 임산부가 서류를 위조해서 탑승했을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법이 개정되어 원정출산은 시들해졌다고 한다. 개정된 법에 따라 주거나 이주 목적으로 미국 영토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남자 아기의 경우 병역의 의무를 필하기 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십여 년 전의 이야기인데, 2022년에 돌아보니 뭔가 '웃픈' 생각이 든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PublicDomainPictures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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