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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바로 알기-3

‘스탈린 대숙청을 폭로한다!’

by 김남기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who-was-Joseph-Stalin.jpg 이오시프 스탈린 사진.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스탈린의 학살자 내지는 범죄자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전개된 ‘대숙청(Great Purges)’이다. 스탈린의 대숙청은 냉전 시기 스탈린의 독재자 내지는 폭군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 사용된 소재다. 서구 사회에선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내러티브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반공주의 성향을 가진 영국의 역사학자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는 수백만 명이 죽었다고 추산했고,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강제 수용소인 굴라그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를 합쳐 스탈린이 2,0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창조해냈다.

81stX3vVc6L._AC_UF1000,1000_QL80_.jpg 스탈린 2,000만 학살 거짓말을 광범위하게 퍼뜨린 로버트 콘퀘스트의 저서.

역설적으로 로버트 콘퀘스트의 거짓말은 1980년대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되면서 대숙청을 소위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서구의 연구들이 나오게 됐고, 대표적으로 아치 게티(Arch Getty)라는 역사학자는 문서고 자료를 기반으로 대숙청이 서구에 의해 과장되었음을 폭로했다. 또한, 호주의 역사학자인 쉴라 피츠패트릭(Sheila Fitzpatrick)은 소위 스탈린의 대숙청을 러시아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분석하면서, 이와 같은 대숙청이 “위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와 더불어 일련의 과정과 정책들이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 분석했다. 비록 대테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계급투쟁 및 민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분석하며, 프랑스 혁명 시기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리즘과 유사한 것으로 봤다.

maxresdefault (2).jpg 한국에서 묘사하는 대숙청의 이미지.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수정주의적 해석에 근거하여 소련사를 연구한 서울대의 노경덕 교수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숙청을 분석했다. 노경덕에 따르면, “대숙청은 혁명을 주도했던, 즉 혁명 이후 관료가 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었다고 주장했다. 비록 스탈린의 개인적 정적들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주요 타깃은 이런 정적들보다는 공산당 관리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쉴라 피츠패트릭의 자료를 인용하자면, “스탈린 혁명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은 지역 관리의 '권력 남용'을 고발하도록 권고 받았고, 그렇게 고발당한 관리는 조사를 받고 종종 해임됐다. 대숙청 시기 군부나 고위 관료, 정치 지도자 등과 같이 소련 사회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계급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 대중에게 지목받아 처벌당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인물인 아치 게티는 저작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Great Purges)』에서 대숙청의 진상을 폭로했다. 아치 게티에 따르면, “이른바 스몰렌스크 문서들을 연구한 결과, 소련에서의 숙청에 대한 서방의 설명들은 그 대부분이 지지할 수 없는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었다.” 즉, 신뢰할 수 없고 근거가 부족한 출처들이 마치 진실로 포장되었다는 것이다. 아치 게티의 연구를 보다 자세히 보면, 스탈린의 대숙청은 소위 “계획되고 준비되어 수행된 하나의 과정으로 고찰될 수 있는 일관된 현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숙청의 주요 대상은 고참 볼셰비키였다는 스탈린의 정적 트로츠키의 주장은 실제와는 큰 관계가 없음을 보여줬다. 아래 아치 게티의 주장을 한번 보도록 하자.


“1933년부터 1939년의 사건들은 모두 계획된 테러가 점차 고조된 것도, 단일한 현상이나 과정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1933~1936년의 당원 숙청은 단순히 1937년에 벌어진 정치적 테러의 서곡이 아니었으며, 단지 간접적으로만 그것과 연관이 있을 뿐이다.”

9788993852134.jpg 스탈린 대숙청에 대한 서구의 거짓말을 폭로한 마리오 소사의 저서.

앞서 언급한 노경덕 교수는 지난 2022년에 저서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을 출간했다. 해당 책에서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외 위기 속에서 스탈린 지도부는 소련 내부 사회 단속에 나섰다. 그 계기는 스탈린 측근인 레닌그라드 당서기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 사건이 제공해 주었다. 스탈린파는 그 직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과거의 경쟁자를 포함한 주요 반대파 인사들을 처형했다. 소련 정권의 안위가 이런 숙청의 핵심적 이유였다. 하지만 그 안위는 단지 정적들에 의해서만 흔들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소련 정권이 외세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대비하는 노력에 방해가 되는 이들 역시 숙청의 표적이 되었다. 그중에는 위에서 언급한 명령 경제체제를 통해 권력을 쌓은 부패 국가 공무원 및 당원이 우선 포함되었다. 이들에 대한 비밀경찰의 내사가 시작되면서, 이들 조직과 직간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던 수많은 인물이 처벌 대상으로 드러났다. 물론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불의와 음모가 결합하면서 무고한 이들이 잡혀가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숙청이 당시의 권력층인 당원과 공무원을 주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 특히 이들의 부패와 무책임, 과업 완수 실패 등이 주요 근거가 되었다는 점은 기억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스탈린의 숙청은 서방의 미디어가 전하는 이미지처럼 선량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는 아니었다.”

9780521335706i.jpg 스탈린 수정주의 연구의 대표적인 저작 <대숙청의 기원>.

쉽게 말해, 서구가 주장하는 것처럼 스탈린의 학살자적 독재자적 그리고 폭군적 이미지를 강조하는 사건인 대숙청은 아무 상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을 주로 타깃으로 한 무차별 학살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특히 스탈린 대숙청 중 비판받는 사례 중 하나는 바로 군부 숙청이 있다. 그러나 군부 숙청에 대해서도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학자들이 분석했으며, 과거 서구의 반공 선전들은 상당 부분 반박됐다. 예를 들어, 1940년 겨울전쟁이나 1941년 독소전쟁 개전 당시 스탈린의 숙청으로 소련군이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서구사회의 클리셰다. 그러나 문서고 혁명으로 밝혀진 연구는 군부 숙청의 맥락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 스탈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국가 안보였다. 이것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주사변과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장이 한몫 했다. 그 점에서 스탈린은 안보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그리고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중공업 위주의 공업화를 단행해야만 했고, 군사력을 증강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한 군부 세력들이 숙청됐다. 예를 들어, 1938년 하산호 전투를 지휘했던 바실리 블류헤르(Vasily Blyukher)의 경우 숙청된 이유가 단순히 스탈린의 개인 권력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블류헤르는 반소비에트적 우파 조직 결성과 군사 쿠데타 음모, 업무지에서의 폭음, 군기 문란 등의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었다. 실제로 블류헤르가 지휘한 소련 군대는 군대 내의 사창가를 만들었고, 몽골 지역에서 불교 사찰 및 문화재를 약탈했으며, 라마승을 강간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즉, 그런 맥락에서 숙청된 것이다. 대숙청 시기 군부 숙청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스탈린 시기 대숙청을 거치면서 소련의 붉은 군대는 숫자와 질적으로 성장했는데 이 부분은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대숙청의 실질적인 사망자는 과연 몇 명일까? 로버트 콘퀘스트와 같은 반공학자들은 1930년부터 1953년까지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이 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 1,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퍼뜨렸다. 이 중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 이상이 1937년에서 1938년에 처형되었다는 것이 콘퀘스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옐친 시절 옛 소련 문서고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된 디미트리 볼코고노프(Dmitri Volkogonov)에 따르면, 1936년 10월 1일부터 1938년 9월 30일까지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30,514명이었다. KGB 보도 자료에는 1930년부터 1954년까지 반혁명죄로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78만 6,098명이었다. 따라서 KGB의 자료에 따르면, 이들 중 68만 1,692명이 1937년에서 1938년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를 토대로, 앞서 언급한 미국의 역사학자 아치 게티는 대숙청에서 총살당한 사람이 68만 1,692명이라고 결론지었다.

71oR-6J739L._AC_UL600_SR600,600_.jpg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한 이탈리아 학자 도메니코 로쉬르도의 저서.

보통 대숙청 수정주의 연구는 이 수치를 대숙청의 실질적인 희생자로 잡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 연구를 한 스웨덴의 활동가 마리오 소사(Mario Sausa)나 미국 몽클레어 주립대학교 교수인 그루버 퍼(Grover Furr)는 이것보다 더 낮은 수치를 제시한다. 대략 10만 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보는데, 이것은 소련 정부가 사형 선고를 내렸다 해서 그들 모두가 실제로 처형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형수들 중 적잖은 이들이 노동수용소에서 유기징역형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이를 토대로 실제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된 사람은 10~20만 명 사이로 보기도 한다. 마리오 소사에 따르면, 스탈린 시대 감옥에 간 사람의 압도적 다수는 실제로 최고 5년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실제 5년 내지는 10년 이상의 장기수들이 많았다고 보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대숙청에 대해 정리해봤다. 실제로 스탈린에 대해 연구해보면, 이와 같은 근거와 역사적 사실들이 있고, 비교적 풍부한 연구 자료들이 있지만, 이런 사실은 대중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해 한줄 요약하자면, “실제로는 민중이 참여하는 계급투쟁이었고, 무고한 희생이 없지는 않았지만 서구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지극히 과장되었다.”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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