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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바로 알기-5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 나치와 소련의 동맹이라고?

by 김남기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26e5d588-cea6-4c3b-bb56-86a18c59436e.jpg 모스크바에서 체결되고 있는 독소 불가침 조약.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9일 전인 1939년 8월 23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이던 나치 독일과 소련이 조약 하나를 체결했다.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체결한 이 조약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것이 바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으로 불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다. 참고로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는 소련과 나치 독일의 외교관이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지 8일 뒤인 1939년 9월 1일 아돌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폴란드는 나치에게 1달 만에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이 폴란드 동부 지역 중 일부를 접수하게 됐다.

_XwjIMeqPeBLxy250we54yAf4mDl_hyL0jYroyrP7lHTz8-XiwMN5d74_rrXD4KOJ6rlOJgJYG7R9CDUC1V0Ug.jpg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양국의 사랑이라며 왜곡하는 서구의 풍자화.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것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당시 폴란드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스탈린의 폴란드 동부 지역 접수는 소련의 영토 팽창적 야욕으로 보기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도 무리가 있다. 이야기를 다시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돌리겠다. 현재 서구사회와 서구의 주류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히틀러와 스탈린이 맺은 이 조약을 마치 양측의 군사적 동맹 관계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이런 시각은 반공주의적 성향이 강한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그리고 발트3국과 같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나타났다. 또한, 트로츠키를 좋아하는 트로츠키 지지자들도 이런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하기도 한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점령 관련한 폴란드 측에서 만든 지도 자료.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1차적인 출처는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서구학자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폴란드의 모라비에츠키 총리가 2020년 초에 “스탈린이 폴란드를 분할하려고 공모하지 않았고 스탈린이 히틀러에게 천연자원을 공급하지 않았다면 나치 독일의 범죄 기구가 유럽을 점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반소적인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현재 유럽이 가진 보편적인 반소-반스탈린 내러티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소 불가침 조약은 말 그대로 불가침 조약이지, 양국의 군사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왜 독소 불가침 조약이 양국의 군사동맹이 전혀 아닌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았다. 반유대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던 아돌프 히틀러는 공개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고, 자신의 자서전 ‘나의투쟁(Mein Kampf)’에서 밝혔듯이, 생활공간 확보를 위해선 동부로의 영토확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당시 히틀러가 이탈리아와 일본과 맺은 조약들을 보면 반코민테른 조약도 있었으며, 이러한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면에선 서구 제국주의의 이득과도 궤를 같이했다. 거기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고, 시베리아에 있는 소련 국경까지 도달했다. 당시 소련은 동부에선 일본 제국을 서부에선 나치 독일이라는 적이 있었으며, 안보적 차원에서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군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2949993309_CmezZMUf_02.jpg 히틀러와 스탈린: 두 인물은 한국과 서구 사회에서 마치 동급의 악인으로 취급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서구의 왜곡되고 그릇된 시각에서 비롯됐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1936년엔 파시스트인 프랑코가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켜 내전이 일어났다. 더 나아가 나치독일은 1936년엔 라인란트를 접수하고, 1938년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접수했다. 1937년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1938년에는 식민지 조선의 국경지대인 하산호와 몽골-소련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본군과 소련군이 충돌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주는 건 당시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사회주의를 방어해야 했다.

Trotsky-Speaking-e1571423913347.jpg 레온 트로츠키: 한때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했던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스탈린에 대한 온갖 악선전을 퍼뜨린 인물이었다.

따라서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발표한 디미트로프 테제를 통해 인민전선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인민전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빛을 보았다. 1930년대 아시아와 유럽에서 파시즘이 사회주의를 위협하자 소련은 1935년부터 유럽의 집단 안보 체제를 제안했다. 이것은 현실적인 제안이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방연합군과 소련이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당시 트로츠키는 이 조약에 대해 “세계혁명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점에서 트로츠키의 노선은 현실적이지 못했고,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래는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과 역사학자 피터 커즈닉이 공동 집필한 미국사 서적에 내오는 내용이다. 한번 보도록 하자.


“히틀러는 1939년 3월 다시 도발을 감행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것이다. 스탈린은 다음 차례는 곧 소련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수년 동안 서방국들에게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맞서 공동으로 대항하자고 강력히 촉구해왔다. 심지어 1934년에는 국제연맹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침략적인 파시즘 국가들에 대항해 집단안보 조치를 취하자는 소련의 호소는 번번이 무시당했다. 히틀러의 체코 침공 직후 스탈린은 또다시 영국과 프랑스에 동유럽에 대한 공동 방어를 촉구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 반응도 없었다.”

ULH42AP3YBKQ5OPNMZHEYPUR34.jpg 여전히 러시아에서 재평가 받는 이오시프 스탈린.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에 고문단과 전차 부대를 보냈다. 최근 서구학계에서도 당시 스탈린이 많은 무기와 물자 및 병력을 보냈지만, 서방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감을 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스페인 내전 시기 스탈린이 프랑코 파시즘에 맞서던 민주진영을 지지하고 있을 때, 서방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알려진 윈스턴 처칠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해 호감을 표했었다. 1938년 영국,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와 체결한 뮌헨 협정은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양보한 조치였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 및 비판 성명을 냈던 주체가 바로 스탈린이고 소련이었다. 아래는 그리스 공산당(KKE)에서 출간한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Truths and Lies about Socialism)’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련은 그 협정(독소 불가침 조약)을 마지막으로 체결했고, 이후 보게 될 것처럼, 민주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쏘련의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에야 체결을 했다. 따라서 역사 위조자들에 대한 두 번째 주요 논쟁 지점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서명은 파시즘-나치즘과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친밀성의 최고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하거나, 소련과 독일 모두 똑같이 제국주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1939년 3월 다시 한 번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정복을 방해받지 않고 이루었다. 쏘련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침략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81LjDZQDuDL.jpg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2019년 개정판: 글쓴이는 이 시리즈를 한국어 번역본으로도 읽었고, 다큐멘터리 버젼도 감상했다. 왜곡된 역사를 아는 데 있어 좋은 책이다.

심지어 1939년 8월까지도 소련은 영국, 프랑스와 막바지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서방의 두 정권은 협상을 마무리할 권한이 없는 하위급 대표단을 보로실로프(Voroshilov)는, 새로운 독일의 침공이 발발하면 동맹국들이 함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속력이 있고 구체적인 협정내용을 주장했다. 그는 만약 독일이 쏘련에 침입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국과 프랑스의 사단이 히틀러와 싸울 것인지 알고 싶어했지만, 서방으로부터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다. 아래는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가 집필한 ‘스딸린 바로 보기(Another View of Stalin)’에 나오는 내용이다.


“소련은 모든 제국주의 정권으로 구성된 단일한 반쏘련 전선이라는 생사가 걸린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암묵적 지지로, 독일은 폴란드를 차지한 후에 계속해서 전진하여 소련에 대한 전격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본은 시베리아를 침략할 것이다. 당시에 히틀러는 이미 프랑스와 영국이 저항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소련을 침략하기 전에 서부 유럽을 손에 넣을 것을 결정했다. 8월 20일, 히틀러는 소련에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에 즉각 반응하였고, 8월 23일 조약에 서명하였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저서 '제3세계의 붉은 별': 이 책은 2018년 국제전략센터에서 번역했다. 글쓴이가 매우 강력추천하는 명저다.

당시 스탈린이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건, 안보적 위협에서 이들에 맞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아래는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의 주장이다.


“소비에트군 총참모부는 스페인 함락 이후 나치와 제국주의 블록의 침략이 소비에트 연방에 파멸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했다. 나치는 이미 1938년에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1939년 3월 리투아니아 정부를 위협했다. 이탈리아도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두 파시스트 열강 이탈리아와 독일은 1939년 5월 결정적인 강철조약(Pact of Steel)에 서명했다. 1938년 뮌헨 회의에서 파시즘 블록에 대한 영국의 유화책은 제국주의와 파시즘 블록의 공모를 암시했다. 이것이 바로 1939년 8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약의 맥락이었다. 거기서 소비에트는 불가피한 나치의 공격 이전에 군사력을 건설할 시간을 벌기를 희망했다. 파시즘과는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정치’의 영역이다. 다가올 전쟁 이전에 시간을 버는 방법이었다.”

ZqCG3.jpg 독소 불가침 조약 이전 서구와 파시스트 국가 사이에 체결된 조약들: 이렇게 보면 서구는 역사를 지극히 왜곡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독소 불가침 조약은 어디까지나 스탈린이 미래에 있을 히틀러의 팽창정책에 맞서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근본적으로 불신적 행위를 자행한 서방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이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이 폴란드 절반을 분할 점령한 것은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부분을 따랐을 뿐이며, 적백내전이 진행된 소련-폴란드 전쟁에서의 소수민족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사안이다. 단순히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지 2년도 안되어, 소련을 침공했다. 이러한 점을 보면, 소련과 나치는 군사적 동맹관계가 아니었음이 입증된다. 따라서 독소 불가침 조약은 어디까지나 서방 제국주의의 기회주의적 태도에서 비롯된 소련의 전략적인 행위였을 뿐 동맹이 절대 아니었다. 즉, 독소 불가침 조약이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맹이라는 주장은 히틀러와 스탈린을 전체주의론적 접근으로 묶어 보려는 서구의 그릇된 시각에서 비롯된 역사왜곡이라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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