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세 자녀가 있다. 그중에 가장 질문을 자주 하는 아이는 둘째(딸)다. 둘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둘째는 아빠인 나에게 가족 중에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둘째가 자기를 포함한 세 자녀들 중에 누가 제일 좋으냐는 의도로 물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엄마가 제일 좋지!"라고 답을 했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 사실을 강조해 왔다.
"아빠는 엄마를 제일 사랑해!"
"아빠한테는 엄마가 제일 중요해!"
"엄마한테 함부로 대하면 안 돼!"
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년 동안 아내는 아빠인 내가 자녀를 훈육할 때 단 한 번도 이견을 낸 적이 없다. 젊은 아빠로 너무 혈기가 앞서 큰 아이를 훈육할 때도 아내는 인내로 지켜보았다. 내가 금세 폭발할 것처럼 예민한 사춘기의 딸들을 대하는 데 어리숙할 때도 아내는 여전히 아빠인 내 편을 들어주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은 엄마는 늘 아빠 편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제는 아들인 첫째가 성인이 되었고 딸들인 둘째와 셋째도 사춘기의 예민함을 벗어나서 이제는 우리 부부에게 세 자녀가 아니라 세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친구는 내 아내이다.
둘째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 말고 우리 셋 중에는 누가 제일 좋은데?"
나는 세 아이들 중에 누가 더 좋고 덜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답을 해주었더니 둘째는 답이 흡족했는지 그 후로는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빠는 멀리 여행을 갈 때는 오빠가 제일 좋고 산책을 나갈 때는 둘째인 네가 좋고 쇼핑을 갈 때는 막내가 좋지."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났고 세 아이들도 제각각 자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답은 여전하다. 아들인 첫째는 평소에 나한테 질문을 하지 않는다. 보통 아빠와 아들처럼 우리 부자도 집에서는 별 대화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을 때 가까운 거리라도 차를 타고 나선다. 내 옆에 앉은 아들에게 내가 몇몇 질문을 던지면 아들은 제 생각을 주저 없이 나눈다. 얼마 전에도 고향인 공주를 함께 다녀오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아들과 자전거를 타고 국내여행을 하거나 기차를 타며 유럽을 여행하고 싶다. 아마도 아내랑 여행할 때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요즘도 가끔씩 밖에 같이 나간다. 지난 방학에 둘째와 가까운 아트 갤러리에 다녀왔다. 얼마 전에 전화통화하면서 인도에 아트캘러리를 학교에서 함께 방문했는데 아빠랑 한국에서 갔을 때가 더 좋았단다. 가끔은 둘째와 단 둘이 카페에 가기도 하고 밤늦은 시간에 한국의 밤을 즐겨야 한다며 중심상가에 나가서 떡볶이를 먹고 들어오기도 했다. 둘째와 같이 나가면 매번 아이가 나한테 먼저 질문을 한다. 평소에 질문을 아껴둔 것처럼 다양한 질문을 한다. 둘째의 어렸을 때 질문들은 재밌고 신선했다. 가끔은 엉뚱했지만. 요사이 질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기까지 한다. 사회 이슈에 대한 질문도 하고 철학적인 질문도 한다. 이런 질문들은 종종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이 달라도 여전히 대화할 수 있는 아빠가 되려고 노력한다.
셋째는 어렸을 때 마트를 함께 가면 가장 리액션이 좋았다. 이번 방학에도 셋째는 친구들과 쇼핑을 하러 부평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언니, 오빠와 달리 양손을 무겁게 쇼핑을 해서 돌아왔다. 쇼핑에 거침이 없다. 한 마디로 무엇인가를 사 주는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아이다. 그래서 그럴까 셋째가 무엇인가를 사고 싶다고 할 때 거절하기가 싶지 않다. 얼마 전에는 자기 통장에 있는 돈의 반 이상을 써서 아이패드를 사겠다고 해서 허락했다. 나는 요즘도 가까운 편의점이나 마트를 갈 때 셋째한테 같이 가자고 꼬신다. 첫째와 둘째는 잘 나서지 않지만 셋째는 나설 확률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께 가서는 나는 꼭 셋째가 먹고 싶은 것을 따로 사준다. 몇 백 원 혹은 몇 십 원 아껴서는 몇 천 원 하는 것을 사주고 온다. 나는 그런 재미에 셋째를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