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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Mar 02. 2024

고성 여행, 우연한 순간이 건네는 깊은 여운

대책 없이 스케치하는 여행 그림들

2월 말,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남편과 화진포 콘도를 예약하고 전날까지 여행 준비도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눈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시아버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일기예보를 확인합니다. 

부랴부랴 콘도에 전화를 하니, 여행 당일 아침 9시까지 대설특보가 해제되지 않으면 전액을 환불해 준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쌓이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내일의 여행 취소를 확신하고 남편과 저는 잠실 놀이공원 표를 예약합니다. 아이들과 고성에 가는 척 하면서, 잠실 놀이공원으로 서프라~이즈하고 들어갈 때 아이들이 기뻐할 모습에 남편과 저는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 출발 당일, 영동지방 대설특보가 해제되었습니다. 콘도에 전화하니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합니다. 그제서야 10분 만에 옷 한벌씩을 챙겨서 고성으로 출발합니다. 아이들을 놀래켜 주고 싶었던 남편과 저의 계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아마 놀이공원에 정말 가고 싶었건 건 저와 남편이었나 봅니다ㅎㅎㅎ


양양고속도로를 타고 속초를 향해 달려가는데 하루 전날까지도 폭설이 내린 영동지방의 설경에 아이들은 많이 놀라는 눈치입니다. 속초중앙시장에 도착해서 떡볶이와 탕후루를 먹고, 잠시 휴식한 후에 우리의 목적지인 고성 화진포로 향합니다.

일년에 몇번씩 찾아가는 속초 청간정, 양양 설악해변, 강릉 송정해변과 비슷한 풍경일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이 탄 차량은 편안하게 화진포에 들어섭니다. 잠시 후에 운전석 쪽으로 이런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제서야 화진포가 북쪽 바다, 산, 호수가 어울려 있는 특별한 곳이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 후에 쭉 펼쳐지는 화진포의 모든 풍경은 상상해본 적도 없고, 제 인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북쪽 지방 태초의 모습들입니다. 

    

동네에서는 꽤 유명한 돈까스 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콘도에 들어와서 조용한 저녁시간을 보냅니다. 내일 방문할 통일전망대는 어떤 곳일까 생각했는데, 두세 번 방문했던 임진각 통일전망대가 떠오릅니다.  

다음날이 밝았는데, 숙소에서 바라보는 북쪽 바다가 너무 추워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은 따뜻한데, 바다가 내 눈에 몹시 추워보이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그 짧은 순간에 펼쳐집니다.

   

라밥으로 아침식사를 한 뒤에 고성 통일전망대로 향합니다. 임진각 방문과는 달리 주의사항이 정말 많아서 놀랐는데, 전망대에 올라서 지도를 본 후에야 우리가 도착한 곳이 남한의 최북단 지점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바로 코 앞에 놓인 저 곳이 DMZ, 오른쪽 깊고 푸른 바다가 해금강, 왼쪽의 그림 같은 한 시퀀스가 금강산 외금강 자락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코 앞이 북한이라는 말에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북한의 바다와 남한의 바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서로 이어진 바다의 이름이 다르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고민도 되고, 내가 사는 세상은 원래 그렇다는 얄팍한 자기합리화가 가슴에서 올라오기도 합니다.


고성 통일전망대 안에 있는 전쟁 박물관, DMZ 박물관을 들렀는데, 전쟁 지역의 소리를 재현한 전시관 앞에서 막내곰은 몸이 굳어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합니다. 연출된 총소리, 폭탄소리, 비명소리만 듣고도 발걸음이 굳어 버리는 삼남매 곰을 보면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아이들의 유연함, 아름다움, 모든 가능성을 간직한 생명의 힘이 생존에 대한 공포심에 눌려서 꽃 한 송이 피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져 버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통일전망대에서 나와서 딸기축제가 한창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삼남매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접시를 자신의 노력으로 채웁니다. 키가 작은 막내도 조심조심 까치발을 들고 음식을 담습니다. 아빠곰 엄마곰이 멀리서 지켜보며, 뜨거운 음식에 데이지는 않을까, 어른들과 부딪쳐서 접시를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아이가 미끄러지지는 않을까 마음 속 걱정이 산더미지만, 최대한 담담하고 당연한 표정으로 아이의 노력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제 자신의 걱정을 이겨내며 지켜볼 뿐입니다. 

속초 설악산책을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책을 한장이라도 읽자고 제안하였지만, 아이들은 정말 한 장만 읽고 1층에 쌓인 눈밭으로 뛰어나가 정신없이 눈싸움을 합니다. 영리한 둘째곰은 그 사이에 장갑도 끼고, 막내곰도 차에서 장갑을 가져와 손을 보호합니다. 중1 첫째곰은 맨 손으로 그 차가운 눈을 30분동안 주무르다가 동상의 전단계처럼 손이 보라색으로 변하기 직전입니다.

동생들은 장갑을 끼는데 너는 왜 맨 손으로 하니, 장갑이 없으면 조금만 놀다가 멈췄어야지,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할거야 등등 첫째곰을 향해 제 입에서 쏟아내고 싶은 모든 말을...침과 함께 꿀꺽 삼켜버립니다.

엄마 곰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입은 어색하게 미소짓는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첫째곰에게 화장실에 가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라는 한 마디만 건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고성 여행에 대해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침묵은 특별했다는 의미입니다. 지루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나 다음에는 여행 안오고, 할머니랑 있을래" 라고 말하는데, 아이들은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제 핸드폰을 만진 아이들은 엄마아빠가 롯데월드 티켓을 예약했다가 취소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순간 아이들이 놀이동산을 못가고 고성에 다녀온 게 얼마나 아쉬울까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첫째곰이 말합니다.

"엄마, 하나도 아쉽지 않아."


그 시간에 어떤 즐거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속 깊은 우연이라는 순간이 건네는 소중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계획 없이 잘 알지도 못한 채 최북단 바다에 어설프게 도착하였고, 너무 놀란 표정으로 금강산 자락과 해금강을 목격하였으며, 내 머릿속에 그어진 휴전선은 인간의 인식이 만든 휴전선일 뿐, 자연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분단이라는 걸 바다 위에서 마음껏 자유로운 바람과 파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1월 몽골여행, 2월 고성여행을 통해서 저는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유럽과 미국을 가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찾아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 인식 속에 그어진 분단을 넘어서 몽골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어한다는 알타이 산맥과 고비사막, 흡수골 호수 등 한반도 너머로 이어져 있는 가까운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몽골 여행은 정말 특별한 한 걸음, 내게 큰 의미가 되어준 한 걸음입니다.


지금도 몽골여행 사진을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몽골 대륙의 힘 있는 탱그리 신이시여, 부디 우리 가족들을 당신들 세계의 진실한 여행자로 한 번 더 불러 주세요."

고성 여행을 마치며 기도합니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모든 우연에 감사합니다.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씨실 날실의 매듭을 잊지 않고, 우연이 건네는 커다란 기적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고개 숙이며 살아가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공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는 걸,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성의 금강산 자락, 해금강의 물결, 차가운 마음을 지닌 호수, 나무 위에 내려앉아 자신의 무게를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함박눈 그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맘디터의 고성여행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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