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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Mar 09. 2024

70세 친정어머니의 중학교 입학

우리집 네 번째 학생, 엄마가 55년 만에 책가방을 매던 날

친정어머니는 중학교를 중퇴하셨습니다. 그 굴곡진 인생을 말로 다할 순 없지만, 딸들보다 유독 손주들과 잘 통하는데, 좋게 말하면 아이들 입장에서 공감과 대화를 하는 능력자이고, 좀 사실적으로 말하면 정말 아이들 수준의 눈높이를 갖고 있어서 딸들과 하루도 빠짐 없이 티격태격하는 특별한 할머니입니다.


아이들이 성장할수록 할머니의 자리는 좁아집니다. 작년 가을에 어떤 고민 끝에,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어르신 중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학교에 찾아가서 원서를 썼고, 엄마는 "내가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말씀을 반복하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으셨어요.


올해 중학생으로 입학한 엄마는 저희 집 첫째곰과 같은 날, 입학식을 하셨어요. 교과서를 받고, 1학년 3반이라는 소속도 부여받고, 과목별 시간표도 확인하는 엄마의 모습이 사실 제 눈에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주중에 처음으로 수업을 다녀오셨는데, '과학은 (    )에 대한 탐구이다'라는 선생님의 문제에 엄마께서 손을 들고 "답은 자연입니다"라고 발표하셨고, 같은 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우리반에 영재가 있네"라는 칭찬까지 들으셨다고 합니다.


사실 엄마는 작년에 지독한 발목 관절염을 얻으셔서 다시 관절이 붓고 통증이 시작되면 학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5일 정도 학교를 다녀오신 엄마는 중학생 손주의 방에서 아이 교과서를 펼치며

"진짜 나랑 교과서가 똑같네. 우리도 방정식 배울 거라고 하던데"라는 기특한 말씀도 하십니다.

저에게 학교를 전화를 걸어서 이런 이런 이야기 좀 해 주면 안되냐고 부탁하시기도 합니다.

엄마가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까, 제가 엄마의 학부형이 되었다는 게 제대로 실감납니다. 

"엄마, 노트 챙겼어?"

"엄마, 파일 사이즈는 어떤 거 가져오래?"

"엄마, 사물함 열쇠는 잘 잠궜어?"

"엄마, 배 안고파?"

이렇게 학생이라는 신분은 누군가의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특별한 힘이 있나 봅니다.

엄마의 시험기간이 되면 엄마를 위해 보약이라도 지어야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듭니다ㅎㅎㅎ


아침에 제가 아이들에게 간편식을 먹일까봐 불안하셔서, 아침마다 현관물을 여는 순간부터 잔소리를 하셨던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부리나케 본인을 기다리는 교실을 향해 그 느릿느릿 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은 엄마만의 가방도 없어서 올해 중학생 된 첫째곰이 작년까지 매고 다닌 초등학생 백팩을 사용하시는데, 그 가방을 매고 뒤뚱거리며 현관물을 나서는 엄마의 뒷모습이.. 꼭 달팽이 같습니다.


"엄마.. 관절염이 도져서 오늘 그만 두더라도, 내일 그만 두더라도 괜찮아요. 엄마가 학생이 되어 책가방을 매고 학교를 가고, 내가 엄마의 학부형이 되어 '엄마, 공부 열심히 하고 와요'라고 인사했던 이 특별한 시간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그리고 우리집 네 번째 학생이 학급 교실에서 영재였다는 걸, 제 주위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자랑할게요ㅎㅎㅎ"

 

70년을 살아온 엄마 인생은 어떤 속도로 흘러가고 있을까 실감나진 않지만, 자신의 몸이 도무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오늘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온 힘을 내서 한걸음 한 걸음 내딛는 특별한 달팽이.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마음은 신나서 달려가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위의 달팽이'

55년 만에 학생 신분이 된 70세 친정엄마의 하루도 이 동요 속 달팽이의 하루처럼 흘러갑니다.


- 맘디터의 '우리집 네 번째 학생 스토리'를 마칩니다.


< 달팽이의 하루 > (동요)

보슬보슬 비가 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려요

달팽이는 비오는 날

제일 좋아해

빗방울과 친구 되어

풀잎 미끄럼을 타 볼까

마음은 신나서 달려가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야호 마음은 바쁘지만

느릿느릿 달팽이

어느 새 비 그치고 해가 반짝

아직도 한 뼘을 못 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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