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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얀느 Aug 31. 2024

노래하는 저금통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가 숙제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만다라트 계획표(*)라고 아이가 3개월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정하고 실천 방법을 상세하게 채워 발표하는 것이 숙제였다.

선생님이 가족과 의논해서 써오라고 하셨단다. 아마도 3개월간 아이가 목표를 이룰 수 있게 집에서 신경 써달라는 얘기일 것이다. 

평소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는 아이의 숙제를 보자마자 상상에 빠졌다.

아이의 3개월간의 목표라면..

수학 단원평가 100점은 어떨까? 수학에 약한 편이니 공부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싫다고 하면 한글책 100권 읽기도 좋겠다. 얇은 책, 두꺼운 책 적절히 섞어 읽히면 가능할 것도 같다. 아니면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가서 상 받는 것은 어떨까. 정말 짧은 시간에 아이 3개월 목표에 대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가운데는 무엇으로 채울지 생각해 봤어? 아직 생각 못해봤으면 엄마랑 같이 생각해 볼까?"

"엄마, 나 정했어. 생각해 둔 게 있거든."

"그래? 뭘까? 정말 궁금하네!"

"노래하는 저금통! 돈을 넣으면 노래가 나오는 아주 비싼 저금통인데 전부터 엄청 갖고 싶었거든."

"아~"

수학 100점, 한글책 100권, 그림 대회 수상을 상상하며 잠시 행복했는데...

그래도 저금통이라니 꽤나 훌륭하다.

아이는 만다라트 가운데를 노래하는 저금통이라고 적어놓고 이를 위해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들을 고심하며 빈틈없이 적어 넣는다.


학교 발표가 끝난 후 냉장고에 계획표를 붙여놓은 아이는 틈나는 대로 할 일을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으면 혹시 떨어진 식재료는 없는지 물었다. 당장 심부름 갈 수 있다면서. 빨래를 개고 있으면 함께 앉아 갰고, 청소기를 돌리고 있으면 물걸레질을 자처했다. 아이 덕분에 3개월간 현관이 신발로 너저분해 있는 날이 없었다.  

전에는 씻어라, 밥 먹어라, 편식하지 마라, 공부해라,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자냐, 숙제를 이제야 한단 말이냐. 등등 심부름은커녕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잔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잔소리보다 칭찬하는 소리가 더 많아졌다. 무엇보다 아이 스스로 챙기려는 모습이 여간 대견한 게 아니었다.


개봉박두! 드디어 저금통 여는 날이 되었다.

동전과 지폐를 모두 세어보니 25000원 정도가 모였다. 3개월간 아이가 열심히 챙겼으니 5000원을 보태주기로 하였다.

아이가 원짜리들로 낙엽 뿌리듯 자기 머리 위에 돈을 뿌린다. 돈이 너무 많아서 행복해서 그렇단다.




어?! 이상하다, 돈이 없다!

아이가 잃어버릴까 봐 엄마가 맡아둔 돈 3만 원을 잃어버렸다. 짐 많은 것이 싫어 장바구니와 카드 한 장만 챙기고 동네 큰 마트의 문구점에 왔다.

아이 돈은 분명 내 바지 주머니에 넣었는데..

계산대에서 점원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아이와 문구점을 나왔다. 아이가 3개월을 5백 원씩, 천 원씩 모아 만든 코 묻은 돈을 엄마의 부주의로 한순간에 잃어버리다니...

금방 울음이 터질듯한 아이의 얼굴을 보니 미안함에 나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 마음 단단히 먹고 돈을 찾아야 한다.


아이와 함께 바닥을 보며 왔던 길을 되집기 시작했다. 1층, 2층을 샅샅이 뒤지고 주차장까지 샅샅이 뒤졌는데 떨어진 돈은 없었다.

'그렇지. 보이면 누군가 가져갔겠지. 지금 바닥에 보일리가 없지.' 

큰 금액이면 모를까 길에 떨어진 만 원짜리 현금은 그냥 가져갈 것 같은데.. 그래도 마지막 믿을 구석이니 서비스센터에 가보자.




서비스센터에 현금을 맡겨둔 누군가가 있었다.

2층 화장품가게 앞에서 주었다고 누군가가 서비스 센터에 돈을 맡기고 갔다 한다.

아! 밀려드는 벅찬 감동이란..

아직은 믿을만한 세상이구나.

아직은 참 따뜻한 세상이구나

내 것만 챙기며 살다 보니 내 가슴은 로보트마냥 딱딱해진 것 같은데.. 따스하게 밀려드는 감동에 가슴이 말랑말랑 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노래하는 저금통을 직접 계산하여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고 보물 1호가 되었다. 

엄마는 이번 일로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세상은 생각보다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 온기는 크기에 상관없이 아주 작은 양으로도 사람을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 후 작고 사소하지만 내가 나눌 수 있는 온기를 나누려고 하고 있다. 가령 길에서 물건을 떨어뜨린 것을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달려가 물건을 건네주는 일, 버스에서 가방 안 물 세는 줄 모르고 앉아있던 사람에게 손수건을 빌려주는 일, 길 찾는 사람에게 시간을 내어 자세히 알려주는 일 같은 작고 사소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루에도 여러 번 들리는 저금통 노랫소리에 이제는 저금통이 노래를 덜 불러도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노래하는 저금통의 의미가 크기에 얼마든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선물해 주신 그 누군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연꽃기법(만다라트)

활짝 핀 연꽃 모양으로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발상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사고 기법이다. 일본의 마츠무라 야스오가 개발했으며, ‘연꽃만개법’ 또는 ‘MY 기법’이라고도 한다. 연꽃 기법에 사용되는 차트는 불교의 만다라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여 ‘만다라트(Mandal-Art)’라고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 일본의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가 고등학생 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작성했던 만다라트 계획표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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