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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Apr 04. 2023

악어 샌드위치 만들기


1. 우리 아이의 '첫 번째'는 무엇이든 함께 하겠다는 다짐



아이를 갖기 전, 아니 결혼 전부터 생각해 온 다짐이 하나 있다. 어린이집 첫 부모 참여 수업은 무조건 엄마인 내가 참석하겠다는 다짐이다. 부모 양성 평등이니 워킹맘을 위한 배려 부족이니 하는 의견은 상관없다. 넓은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부모님들 사이에 혼자 있을 내 아이를 상상하면 벌써부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혼자 불안해하던 아이가 '우리 엄마'를 발견했을 때 느낄 기쁨과 반가움 그리고 안도감을 생각해 봤다. 설령 해외 출장 중이더라도 바로 귀국하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래서 결혼 전부터 남자친구(현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애 첫 부모 참여 수업은 무조건 내가 갈 거야. 해외 출장 중이더라도 취소하고 바로 올 거야. 그러니까 오빠 나 말리지 마."


남편은 황당한 표정으로 '내가 왜 말려'라는 말을 대신했다. 


"그때 가서 오빠나 양가 할머니들이 가고 싶다고 해도 난 절대 양보 안 할 거란 소리야. 첫 수업만큼은 꼭 내가 갈 거야."

"그래 알겠어, 네가 가. 근데 의외네. 나우나우는 커리어 욕심이 많아서 육아보단 일을 우선할 줄 알았는데. 역시 엄마는 다른가 봐."

"왜, 싫어?"

"아니, 이뻐. 나우나우는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남편은 웃으면서 귀엽다는 듯 내 볼에 뽀뽀를 했다. 그게 싫진 않아서 잠자코 뽀뽀를 받았지만 내심은 달랐다. 나는 남편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마음으로 다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장한 쪽이었다. '엄마와 함께하는 행복한 아이'라는 말랑말랑한 워딩보다는 '워킹맘이란 이름으로 아이를 외롭게 하지 말 것'이란 절실함이 더 컸다. 아이가 아플 때, 전염병이 돌 때 혹은 나와 남편 모두 일이 있을 때마다 양가 할머니들의 도움움을 받을 것이다. 워킹맘이기에 평소 일과 중 엄마의 부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 번째' 수식어가 붙은 날만큼은 엄마가 꼭 함께 하겠다고, 정 안되면 아빠라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기억은 아이와 부모 모두가 함께 공유하길 바랐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미리 선포했다.


"열린 교실, 운동회, 소풍 등 부모 참여 수업은 나던 오빠던 부모 중 한 명이 꼭 가는 거야. 우리 아이한테 엄빠(엄마아빠)가 함께하는 든든한 학교생활을 만들어주는 거야. 알겠지? 오빠도 약속해!"


남편은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없음 반, 귀여워하는 게 나머지 절반인 표정이었다. 결혼 전, 아직 생기지도 않은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 나는 마음가짐을 미리 단단히 다졌다.



2. 어린이집 알림장 : 부모 참여 수업을 개최합니다



그로부터 3년 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제 막 13개월이 된 아들 민준이에게 어린이집 알림장이 도착했다.


수자인 어린이집 부모 참여 수업을 개최합니다.
0~1세 반은 11/28일 월요일 오전 10:00~10:30에 '악어 샌드위치 만들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참석 가능 여부와 참석자 성함을 적으신 후 어린이집으로 보내주세요.


참석자 칸에 자신 있게 내 이름을 적고 아이와의 관계에는 '엄마'를 썼다. 절취선대로 자른 A4 반 크기의 신청서를 상 위에 올려놓고 잠시 바라봤다. '워킹맘이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첫 부모 수업에 참여하는 자상한 엄마인 나'에 심취했다.


친정 엄마도 워킹맘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의 열린 학부모 수업 일정은 내 학교 일정과 항상 겹쳤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참여 수업엔 엄마 대신 할머니 혹은 고모가 대신 참석해 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중학생 즈음 머리가 굵은 이후로는 워킹맘인 엄마가 늘 대단하고 자랑스러웠지만, 아직 10살 남짓의 어린 초등학생 시절에는 나도 우리 엄마와 함께 발표를 하고 운동장을 뛰고 싶다는 서운함이 있었다. 할머니와 고모로부터 받은 넘치는 사랑도 충분히 따뜻했지만, 그래도 엄마가 주는 사랑과는 색깔이 조금 달랐다. 이런 아쉬움을 내 아이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알림장을 받고 보니 겨우 30분 수업을 위해서 오전 반차를 쓰긴 아까웠다. 11월 말, 한창 내년도 사업계획으로 바쁜 시즌에 휴가를 내기도 껄끄러웠다. 차라리 하루 재택근무를 신청할까? 어린이집 수업 때문에 재택근무를 신청하면 역시 워킹맘은 어쩔 수 없다고 욕하진 않을까? 잠시 내적 갈등을 했지만 그래도 재택근무의 시간 효율성이 제일 좋다고 판단했다. 일정 조율을 위해서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저 11/28일 월요일에 재택 근무해도 될까요? 어린이집에서 부모 참여 수업을 있는데, 첫 번째 수업이라서 제가 꼭 참여하고 싶어서요. 오전에 30분만 다녀오겠습니다. 평소보다 일을 조금 일찍 시작해서 업무 일정에는 차질 없게 하겠습니다.'


상황을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업무엔 영향 주지 않겠다는 멘트도 덧붙였다. 팀장님 성향 상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러라고 할 걸 알면서도, 육아 관련 배려를 요청할 땐 항상 긴장됐다. 열 번 중 한 번이라도 거절당하면 다른 회사 일보다 더 큰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네, 그러세요.'


예상했던 답변을 받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 당당하게 회사 달력에 날짜를 표시한 후 의자에 기대서 수업 날을 상상했다.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큰 교실에 혼자 앉아 있을 민준이를 생각했다. 엄마와 눈이 마주친 후 놀라고 기쁜 표정을 지을 아이의 얼굴을 그려봤다. 아이가 느낄 안도감과 편안함 그리고 행복이 느껴졌다. 미리 일정 조율하길 정말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남편과 친정, 시댁 카톡방에 자랑 메시지를 보냈다. 친정 엄마한테서 곧바로 회신이 왔다.


'잘했네. 네가 엄마가 다 됐구나. 세상 참 좋아졌다. 민준이는 좋겠네~'



3. 악어 샌드위치 만들기



수업날 아침, 잠에서 깬 민준이에게 자랑했다.


"오늘 엄마도 어린이집에 갈 거야. 민준이랑 같이 수업 들으면서 맛있는 샌드위치도 만들 거야. 민준이도 기대되지?"


아직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 얼굴이 평소보다 밝게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재택근무날이라 출근길을 서두를 필요 없이 모처럼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늦잠 자서 개운하게 기지개 켜는 아이에게 뽀뽀를 해주고, TV 대신 장난감을 함께 갖고 놀면서 천천히 이유식을 먹였다. 어린이집 가는 길에 새랑 나무랑 고양이도 보면서 즐겁게 등원하고, 문 앞에서 헤어질 때도 '조금 이따 보자'며 웃으면서 헤어졌다.


등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전 9시 10분. 이미 아웃룩과 카카오워크 메신저엔 읽지 못한 메시지들이 쌓여있다. 어제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중요 체크만 해놓은 이메일도 많았다. 50분 뒤 어린이집 수업 시작 전까지 얼마나 처리할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을 다잡고 팀장님과 임원으로부터 온 이메일을 먼저 읽었다. 바로 답변할 수 있는 정보 업데이트는 바로 회신하고, 고민이 좀 필요한 분석 업무는 '확인 후 회신드리겠다'며 시간을 벌었다. 최소 한 시간 동안은 독촉 전화가 안 오겠지? 혹시라도 수업 중에 휴대폰을 붙잡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불상사를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집중해서 업무를 처리했다.


정신없이 이메일을 쓰다 보니 벌써 9시 50분, 슬슬 어린이집으로 출발할 시간이다. 남은 메시지는 모바일 메신저로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어린이집을 향해서 걸었다. 추리닝에 후드티, 너무 편한 복장인가 싶었지만 일하는 와중에도 부모 수업에 참석한 멋진 엄마 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어린이집 입구에 도착한 후,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짧은 복도를 지나서 거실 겸 큰 교실로 들어가니 작은 책상과 방석들이 반원 형태로 나열돼 있었다. 맨 앞 쪽 정중앙에 우리 아들 민준이가 앉아 있었다.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민준아!"


목소리를 듣자마자 민준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 밝고 환한 표정이 아이 얼굴에 떠올랐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땐 이미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있었다. 그런 민준이의 얼굴을 보면서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안도했다. 저 표정을 못 봤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온몸으로 기쁨을 뿜어내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수업 시작도 전에 벌써 행복해졌다. 이 순간을 만들어낸 과거 나 자신의 결정이 기특하고 뿌듯하다.

 

잠시 후 특별활동 선생님이 도착해서 책상마다 샌드위치 재료를 나눠줬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악어 모양 샌드위치를 만드는 것이 오늘 수업의 목표다. 엄마 옆에서 한껏 자신감을 얻은 민준이는 빵과 맛살 등 신나게 재료를 탐색했다. 좋아하는 치즈는 바로 먹겠다며 손에 꽉 쥐었다. 선생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재료는 많으니까 우리 아이들 충분히 맛봐가면서 천천히 재밌게 수업하자고 밝은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어린이집 수업은 선생님 목소리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큰 즐거운 놀이 현장이었다. 엄마와 함께 교실에서 놀이한다는 경험 자체가 수업의 목적인 듯했다. 그 관대함 속에서 교실의 모든 사람들은 여유롭고 해맑았다.


성취 지향적인 나는 수업의 결과물도 중요했다. 한 손으론 아이에게 치즈를 떼어주고 다른 한 손으론 아이 손과 플라스틱칼을 한꺼번에 쥐고서 부지런히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덕분에 교실에서 가장 먼저 목표를 달성했다. 제법 온전한 모양의 악어 샌드위치가 탄생했다.


"와, 민준이가 정말 예쁜 샌드위치를 만들었네요! 이거 저희 샘플 사진으로 좀 찍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성취욕이 한껏 충족되는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사진을 찍은 후, 이건 어머님 점심으로 드시라며 샌드위치를 투명 비늘에 싸주었다. 나도 재빨리 사진을 찍어서 남편과 친정 그리고 시댁 카톡방에 동네방네 자랑했다.




4. 어린이집에서 배운 엄마 효능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양손이 무거웠다. 왼 손엔 아들이 만들어준 퐁글퐁글한 악어 샌드위치를 들고, 오른손으론 부재중 전화에 콜백(Call back)하는 현실의 무게를 느끼면서 집까지 빠르게 걸어왔다. 오전 11시, 다시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았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했던 어린이집 수업을 끝내고 다시 바쁜 회사원의 삶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못다 한 실적 데이터 분석을 마무리한 후 이메일을 전송했다. 그 외 몇 가지 업무를 더 쳐내면서 무사히 오전 근무를 마쳤다. 엄마와 직장인을 넘나드는 정신없는 오전이었지만,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잘 해냈다는 자기 효능감으로 꽉 찬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참 괜찮은 엄마라는 자신감으로 뿌듯해졌다.


집에서 가장 예쁜 접시에 샌드위치를 담아서 식탁을 차렸다. 아끼는 일회용 드립 커피도 내렸다. 아들이 만들어준 첫 점심 식사인만큼 이 정도 수고로움은 감수할 수 있었다. 자랑용 사진을 한 번 더 찍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재료를 조몰락거리던 아이의 작은 손과 진지한 표정이 생각났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햄, 치즈, 야채 등 재료를 하나하나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배보단 마음이 든든해지는 특별한 점심이었다.


오늘 엄마와 함께 했던 어린이집 수업을 아이는 기억 못 할 수 있다. 나도 1살 때 기억은 없으니까, 오늘의 이 특별한 경험은 엄마인 나한테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제법 괜찮은 엄마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으니까, 그만큼 아이 앞에서 더욱 당당한 내가 됐으니까 오늘은 아주 가치 있는 날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행복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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