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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un 06. 2023

어린이집이 우리 가족을 구원했다


1. 어린이집 등록 전쟁



산후조리원에서 꼭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어린이집 대기등록'이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국공립 어린이집, 집에서 가까운 거리, 0세 반을 운영하고 맘카페 후기까지 좋은 곳은 오직 한 군데였다. 선배 워킹맘들이 조언하길, 육아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아무리 친정/시댁 부모님이 도와주더라도 어린이집 등록은 필수랬다. 인기 좋은 은 입소 경쟁률이 치열해서 일찌감치 대기등록을 걸어야 다. 6개월 후 원활한 회사 복직을 위해서 선배 워킹맘들의 조언을 실천에 옮겼다. 아들 민준이의 출생신고를 마치고 주민등록번호가 나오자마자 바로 어린이집부터 등록했다.


'수자인어린이집, 대기순번 8번'


맞벌이 추가점수를 합해도 내 앞에 7명이나 있다니.. 0세 반 정원은 3명뿐인데, 과연 복직 전에 등원할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친정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민준이 주민번호 나오자마자 어린이집 등록했는데도 대기순번 8번이야. 저출산이라더니 우리 동네는 다른 나라인가 봐."

"돌까지는 엄마가 봐준다니깐 뭐 하러 그랬어~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애를 불쌍해서 어떻게 어린이집에 보내니?"

"그래도.. 혹시라도 엄마가 아프거나 급한 일정이 생길 때를 대비해야지. 내년 1세 반에는 꼭 가야 하는데, 0세 반에 미리 입소한 애들은 1세 반까지 자동으로 진급한댔어. 1세 반은 인기가 많아서 더 자리 없단 말이야.."

"에구, 그래그래. 애엄마가 제일 잘 챙기겠지. 그래도 어린이집보단 엄마가 봐주는걸 1순위로 생각해서 잘 결정해."

"알겠어. 고마워 엄마.."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조리원으로 왔다. 남편 품에 폭 안겨서 어린이집 대기순번과 친정엄마의 육아 지원 등 쌓였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남편은 장모님이 큰 도움을 주신다며 좋아했다. 나도 내심 안심했다. 안 그래도 코로나 시국에 어린이집 단체 생활이 안전할지 걱정됐었다. 나를 포함 세 남매를 키워낸 친정엄마가 민준이를 돌봐준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선택지는 없을 것 같았다. 든든한 친정 뒷배를 믿고, 다가올 워킹맘 생활을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다음 날 오후,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조리원 퇴소하면 사부인께서 민준이를 봐주기로 하셨다고? 정말 고마우신 분이구나. 혹시라도 사부인께서 힘드시거나 다른 일정이 생기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렴. 나도 같이 도와줄게."


양가 할머니의 뜨거운 손주 사랑을 보면서 엄마인 내 가슴뭉클해졌다. 갑자기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져서 조리원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유리창 너머의 민준이는 곤히 고 있었다. 마치 온 가족의 축복과 사랑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잠든 표정이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2. 육아플랜의 중심, 어린이집 주간 보육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던 어느 날, 수자인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민준이의 0세 반 등록 차례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등록하겠다고 말한 후, 혹시 가정 보육과 병행 가능할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어머님. 원래는 어린이집 최소 출석 일수가 있는데요, 요즘엔 코로나 때문에 가정보육으로 대체하는 분이 많아요. 출석인정요청서를 제출해 주시면 대체 출석 처리할 수 있어요. 나중에 정식 등원 전에 저희한테 미리 말씀해 주시고요."


통화를 마친 후 곧바로 어린이집에 등록했다. 매달 입금되는 정부 육아지원비로 결제하니, 내가 지불해야할 추가 비용은 없었다.


마침내 완벽한 복직 육아 계획이 완성됐다. 출석인정요청서를 제출하면서 민준이의 어린이집 재원 상태를 유지하고, 돌까지는 양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아이를 키웠다. 2~3명의 자녀를 키워낸 경력자인 만큼 초보 엄마인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민준이를 돌봐주셨다.


돌 무렵의 민준이는 몸무게 10kg으로 무럭무럭 자랐다. 두 손 두 발로 빠르게 기어 다니면서 온 집안 구석구석을 누볐다. 작은 몸이 어찌나 빠른지 벌써부터 엄마의 체력을 쏙 빼놨다.


민준이가 크고 활발해질수록 친정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 도망치는 10kg짜리 남자아이를 안고 업느라 팔꿈치에 통증이 생겼고 허리도 삐끗하셨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아이의 장난은 갈수록 심해질 텐데, 60세가 넘은 친정엄마 혼자서 종일 돌보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 곧 걷고 뛸 민준이에게도 실컷 뛰어놀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슬슬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


퇴근 후, 친정엄마와 민준이 어린이집 등원을 논의했다.


"엄마, 이제 민준이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이미 돌도 지났고 혼자 잘 기어 다니니까 어린이집 생활도 잘  것 같아."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괜찮겠어? 엄마가 좀 더 봐줄 수 있어."

"아냐, 지금도 엄마 너무 힘들잖아.. 어차피 몇 달 후엔 1세 반으로 올라갈텐데, 그전에 0세 반에서 미리 적응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래도 하루종일 맡기기엔 엄마 마음이 불편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맡기려고?"

"원래는 아침 9시 등원 오후 4시 하원인데, 맞벌이 연장반 신청하면 저녁 7시 반까지 맡길 수 있어."

"그럼 엄마가 등하원 도와줄게. 지금처럼 출근 전에 민준이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 엄마가 아침 먹여서 등원시키고 오후 4시에 하원시킬게. 너는 일 다 하고 퇴근해서 데리러 와."


엄마 말에 울컥해서 잠시 말을 멈췄다. 어린이집을 보내겠다고 말을 꺼냈지만, 막상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있을 민준이를 생각하면 미안함에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졌다. 내심 엄마가 등하원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말로 꺼내진 못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어줬다. 작고 주름진 손이지만, 내겐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따뜻한 구원의 손길이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다음 날, 어린이집 원장님과 전화 상담했다. 첫 사회생활에 당황하지 않도록 엄마/아빠와 함께 등원하는 2주일의 적응기간을 추천받았다. 적응기에는 보호자와 함께 오전 1~2시간씩 어린이집 생활을 체험한다.


남편과 상의해서 2주일 적응 계획을 세웠다. 팀장과 상의해서 내가 일주일 재택근무를 신청하고, 남은 일주일은 남편의 오전 반차와 친정/시댁 부모님의 도움으로 일정을 짰다. 우리 아이 & 손주의 무탈한 첫 사회생활을 기원하면서, 아이보다 어른들이 더 긴장해서 등원 날을 기다렸다.



3. 우리 아이의 첫 사회생활 적응기



"민준아, 안녕? 나는 민준이 선생님이야. 만나서 너무 반가워!"


약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0세 반 선생님은 어린이집에서도 제일 선임 교사였다. 낯설어하는 민준이를 자연스럽게 안아주는 모습에서 노련함이 느껴졌다. 교실로 들어가니 민준이 또래 친구 2명이 힘차게 뛰어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아직 기어다니기만 하는 민준이에 비해서 개월 수가 빠른 듯 했다. 처음 만난 친구들이 신기하고 반가운 민준이는 열심히 기어다니면서 교실 여기저기를 탐색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총 7시간의 어린이집 생활이 시작됐다. 친정엄마는 하루 7시간의 자유 시간을 되찾았고, 나도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 덜었다. 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친정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나와 민준이를 향해 웃어줬다.



4. 어린이집, 우리 모두의 구원자



민준이의 어린이집 생활은 가족 모두의 구원이었다. 친정엄마는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에 민준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 후, 아파트 단지 골프연습장에서 골프를 쳤다. 낮에는 합창 동호회 연습을 가거나, 집에서 따듯한 오후 햇살을 받으면서 유행하는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었다. 일상을 되찾은 엄마의 몸은 다시 건강해졌다. 더 밝고 편안해진 엄마 얼굴을 바라보면서 내 안의 죄책감도 조금 누그러졌다.


아들 민준이는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한 후 부쩍 자랐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또래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았는지, 등원 한 달 만에 첫걸음 걷기에 성공했다. 찐 감자와 고구마, 크림수프, 각종 채소스틱과 과일 등 집에서는 챙겨주지 못했던 다양한 간식거리를 맛봤다. 기찻길 따라 걷기, 교실 가득 신문지 찢어서 날려보기, 쌀 튀밥 더미에 숨겨진 말린 과일 찾아먹기 등 선생님 & 친구들과 함께 성장 주기에 딱 맞는 놀이를 하면서 활동 범위가 커지고 움직임도 정교해졌다. '안녕하세요' 배꼽인사나 '사랑해요' 같이 가르쳐준 적 없는 말과 행동도 배워왔다. 어린이집 생활 일 년, 민준이는 어린 아기에서 개구쟁이 어린이로 성장했다.


내겐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생겼다. 매일 오후 1시, 어린이집 키즈노트 앱에 알림장이 올라오는 시간이다. 알림장에는 민준이의 오전 일과 사진과 함께 선생님의 보육 코멘트가 담겨 있다. 바쁜 오전 근무를 마친 후 팀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오면 때맞춰서 어린이집 알림장이 도착한다.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 사진을 보면서 내 기분까지 좋아졌다. 얼른 오후 일을 마치고 칼퇴해서 아이를 봐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덕분에 일도 훨씬 잘 다.


어린이집 보육은 우리 부부에게 지속 가능한 육아 루틴을 완성시켜 줬다. 아이 개월 수에 맞는 보육 환경을 제공하면서 우리는 물론 양가 부모님들의 주간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 엄마/아빠가 직장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펼치는 동안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씩씩하게 자랐다. 워킹 육아를 가능케 해 준 구원자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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