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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Mar 03. 2023

아토피 센터에서 받은 숙제


1. 소아 아토피 치료는 전부 부모 몫



"얘는 하루에 로션 10번씩 발라주세요. 엄마한테 주는 숙제예요"

"아토피 치료는 부모님의 꼼꼼한 관리가 전부입니다. 방 온도는 23도, 습도는 40~50%, 목욕은 하루에 한 번 20분 이상 통목욕으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 주세요."

"약은 총 3개 처방해 드릴게요. 스테로이드 연고니까 사용법 꼭 숙지하세요. '락티코트'는 하루 2번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발라주고, '리도멕스'는 아토피가 심한 손발목과 목에 하루 한 번 발라주세요. '데스오웬'은 등이나 다리처럼 넓은 부위에 잠자기 전 발라주세요. 그리고 하루 한 번씩 유산균과 비타민D도 꼭 챙겨 먹이세요."


교수의 처방이 랩처럼 속사포로 쏟아졌다. 하루 로션 10번이라니, 이제 막 회사에 복직했는데 무슨 수로 10번씩이나 발라주라는 말인가? 심지어 뒤이은 처방은 더 심각했다. 아이는 이제 할머니 집에서 지낼 것인데, 한겨울 방온도를 23도까지 내리면 우리 부모님은 전부 감기에 걸릴텐데? 약 이름과 사용법은 어찌나 복잡한지 과연 내가 제대로 발라줄 수 있을까?


숙제만 한가득 받아서 서울아산병원을 나왔다. 소아 아토피에 제일 유명한 교수라더니 정작 치료는 온통 부모 몫으로 돌렸다. 처음 병원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이가 걱정돼서 뭐든 다 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숙제만 잔뜩 받고 돌아가자니 한숨만 푹푹 나왔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한 지 이제 겨우 3주째였다. 겨우 6개월 쉬었음에도 불굴하고 세상은 나만 빼놓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밀린 정보 업데이트하랴, 잘 모르는 와중에 미팅 들어가고 업무 처리하랴 회사 일에만 집중해도 따라가기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부모 숙제라니, 내 역량 밖이다. 심지어 우리 부모님이 대신해줘야 할 숙제도 많았다. 30대의 젊은 나도 한 번에 알아듣질 못했는데, 60대 우리 부모님이 과연 해주실 수 있을까? 다시 또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운전대를 꽉 잡았다. 엄마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기는 카시트에서 쌔근쌔근 잘 자고 있다.


"병원 잘 다녀왔니? 의사가 뭐라고 했어?"


집에 막 도착했다고 카카오톡을 보내자마자 친정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걱정을 많이 하셨는지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이 상태부터 물었다. 옷도 안 벗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서 통화했다.


"민준이 아토피 맞대. 혹시 해서 채혈이랑 피부검사 이것저것 다 했는데 다행히 알레르기는 아니래. 피부가 너무 건조해서 가려워하는 거니까 로션이랑 약 잘 발라주래."

"그래, 애 데리고 혼자 다녀오느라 고생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너도 어렸을 때 아토피 엄청 심했었어. 지금은 괜찮잖아? 의술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그깟 아토피 하나 금방 치료할 거다."

"그래도.. 나한테 유전된 것 같아서 속상해. 민준이한테 너무 미안하고."

"별게 다 미안하다. 요즘 아토피 아닌 애가 어딨니? 민준이 너 닮아서 건강한 거야 그런 소리 말아."

"참, 민준이가 요즘 친정에서 지내니까 아토피 처방받은 거 엄마한테도 말해줘야 하는데. 지금 집이야?"

"응, 엄마 집이야. 너 오늘 휴가지? 아무 때나 와. 빵 사 왔는데 같이 먹자."


들고 온 약봉지를 그대로 가지고 친정 집으로 향했다. 같은 동네라서 차로 10분이면 충분했다. 친정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혼자 애기 데리고 병원까지 다녀오느라 누적된 피로감, 내 아이가 아토피라는 확진을 받았다는 서러움, 그게 또 내 유전이라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한 데 모여서 눈물로 고였다. 엄마는 내 눈이 빨개진 것을 보고 바로 등짝을 때렸다.


"아이고, 뭐 큰 병이라고 울고 있어. 그냥 로션만 잘 발라주면 된다며. 엄마가 돼가지고, 뚝 그쳐!"


엄마는 말만 크게 하고, 한 편으론 아이를 받아서 조심스레 이불에 눕혔다. 민준이는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쿨쿨 자고 있었다.



2. 내 아이도 진단받은 아토피 피부염



민준이가 아토피인 것을 의심한 지는 몇 주 되었다. 머리 각질부터 팔다리 피부 갈라짐까지 그냥 보기에도 많이 가려워 보였다. 짧은 팔로 시원하게 긁을 수 없어서 찡찡거릴 때면 안타까움 반 귀여움 반으로 내가 대신 긁어줬다. 병원에서도 뾰족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소아과 선생님은 아직 너무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며, 지루성두피염 약과 함께 수분율이 높은 로션을 처방해 줬다. 목욕 후 발라주면 보송보송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다시 건조한 피부로 돌아와서 별로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개월 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나도 아토피가 있어서 여름철엔 팔 안쪽이 많이 간지러운데, 한참 심할 때의 민준이 피부는 마치 그때의 내 피부와 비슷했다. 나는 내심 민준이도 아토피인 것을 짐작했다.


6개월 영유아검진을 받으면서 내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민준이의 팔다리와 목을 살펴본 의사는 종합병원의 정밀 테스트를 추천했다.


"아토피는 맞는 것 같아요. 상태가 좀 심한데, 아직 어려서 어느 정도의 약을 써야 할지 고민이네요. 정확한 원인도 파악할 겸 전문센터에서 진료받는게 좋겠어요."

"혹시 추천해 주실 병원이 있을까요? 인터넷 검색으론 어느 병원이 좋은지 잘 모르겠어서요."

"서울아산병원 홍수종 교수님이 이 분야 최고 권위자예요. 아산병원 소아 아토피 센터로 전원 신청해 드릴게요. 일반 예약은 안 받는 곳이거든요."


며칠 뒤 아산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가장 빨리 예약가능한 날짜는 월요일이었다. 혹시 토요일도 가능할지 조심스레 물었지만 종합병원은 주말에 안 한다는 퉁명스러운 대답만 돌아왔다. 마음을 비우고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기로 결심했다. 나는 가장 빠른 일정인 한 달 뒤 월요일로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날 저녁 남편에게 아산병원 진료일을 말하면서 혹시 휴가를 낼 수 있는지 물었다. 남편은 한창 바쁜 시즌이라서 어렵다며, 되레 코로나 시국에 굳이 종합병원까지 가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 휴가까지 쓰고 개고생 할 각오를 는데, 그런 나를 유난스러운 엄마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받아치는 말에 한껏 가시를 세웠다.


"애가 가려워서 잠도 잘 못 자잖아. 혹시 야옹이(출산 전까지 집에서 키우던 남편 고양이) 털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해결 방법을 찾을 거 아냐."

"아토피에 약이 어딨어? 집 청소 깨끗이 하고 채소 위주로 건강하게 먹는 게 정답이지."

"당장 애가 힘들어하는데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나아지겠어? 됐어, 내가 휴가 내고 혼자 다녀오면 돼. 체질 개선한다고 오래 고생시키느니, 당장 현대 의학에 기대서 우리 아들 덜 고생시킬래."


남편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왔다. 까칠하게 말해서 미안하다며, 우리 아기 일인데 여보 혼자만 고생시키는 것이 속상해서 그랬다고 내게 사과했다. 남편의 풀 죽은 얼굴을 보고 나도 세웠던 가시를 거뒀다. 무리하지 말라고, 차로 얼른 갔다 오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 상대방 고생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죄책감. 육아 부부싸움은 서로를 향한 배려심의 삐뚤어진 형태는 아닐까. 선한 의도였기에 서럽고, 그만큼 더 빨리 화해하곤 한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던 3월, 나는 민준이를 안고 아산병원 소아 아토피 센터를 찾았다. 주차장부터 이미 만차였다. 미리 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센터 전광판 대기번호는 이미 30번을 넘겼다. 이럴 거면 예약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화가 났지만 그만큼 명의라는 반증이겠거니 생각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갓난아기부터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도 외출이라고 다들 예쁜 옷을 갖춰 입은 가운데 우리 애만 내복 차림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엄마와 달리 민준이는 또래 친구들이 많아서 신났는지 기분 좋은 꺅꺅 소리를 냈다.


1시간을 기다린 후 진료실에 입장했다. 민준이의 팔다리를 들춰본 홍수종 교수는 나긋하고 빠른 목소리로 아토피가 맞다고 확진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요. 원래도 건성 피부인데 수분 공급이 제대로 안된 것 같아요. 얘는 무조건 로션을 많이 발라야 해요. 다른 원인도 파악해야 하니 먼저 검사부터 받고 오세요."


오래 기다린 것치곤 5분 만에 끝나버린 면담이었다. 황당했지만 검사 결과를 가져가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거니 기대하며, 각종 검사 뺑뺑이를 돌았다. 알레르기 검사를 위해서 피를 뽑고, 피부 수분도 검사를 위해서 등/배/팔다리 정밀 사진을 찍고, 혹시 모를 천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흉부 X-ray까지 찍는데 총 3시간이 걸렸다. 검사받는 아이와 데리고 다니는 나까지 모두 고생이었다. 멋모르고 유모차를 집에 두고 온 탓에, 나는 검사받고 대기하는 3시간 내내 민준이를 안고 있어야 했다. 내 팔은 점점 감각을 잃어갔다.



3. 도움의 손길



고생해서 얻은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다시 홍수종 교수와 면담했다. 다행히 알러지성 아토피는 아니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출산 전까지 고양이를 키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 영향은 아닐까 걱정했었다. 홍 교수는 검사 결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검사 결과가 깨끗하네요. 특정 성분에 의한 알레르기나 천식 반응은 아니니까, 민준이는 아토피 증상을 개선하는 치료만 잘하면 됩니다."


컴퓨터 화면에 민준이 피부 사진을 띄우고 설명을 이어갔다.


"여기, 피부 갈라진 것 보이시죠? 민준이는 피부가 너무 건조해요. 원래도 아토피 증상이 있는 애한테 건조한 피부는 치명적이에요. 제가 드리는 처방은 로션 10번 바르기입니다. 하루에 무조건 10번 이상 발라주세요. 약 처방은 덤입니다. 약은 가려움을 덜어주는 용도지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에요. 핵심은 수분 보충입니다. 매일 통목욕을 시켜주시고 생각날 때마다 로션을 발라주세요. 민준이 아토피 치료는 전적으로 부모님 케어에 달렸습니다. 엄마가 부지런해야 빨리 나을 수 있어요"


홍 교수는 어떻게 부지런할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방 온도는 23도로 서늘하게, 습도는 최소 40% 이상 유지, 하루 1회 20분 통목욕으로 수분 보충, 로션은 10번 이상 발라주기.


'엄마가 부지런해야 아이가 낫는다는 게 말이야 방귀야. 그럴 거면 뭐 하러 돈 내고 병원까지 오겠어? 지들이 할 일을 왜 나한테 떠넘기고 난리야.'


속으로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홍 교수의 속사포 처방은 계속됐다.


"상태가 심각해서 스테로이드제를 쓸 겁니다. 아직 어려서 모든 부위에 똑같은 농도로 약을 쓸 수 없어요. 아기가 가려워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나눠보죠. 목 뒤랑 팔다리를 가장 가려워하죠? 여기는 리도멕스를 처방할 테니 하루 한 번 발라주세요. 제일 강한 약이니까, 너무 가려워한다 싶으면 한 번만 더 발라주세요. 등, 배, 허벅지도 아토피 기운이 있어요. 넓은 부위라 스테로이드 로션으로 처방할게요. (보조교수를 향해서) 데스오웬 처방하세요. (다시 나를 돌아보며) 얼굴도 약을 발라야 하는데.. 아기 얼굴이라 쌘 약은 좀 그렇죠? (보조교수를 보면서) 여긴 락티코트 처방할게요. 하루 두 번 발라주세요. (다시 날 향해서) 아토피는 먹는 것도 중요합니다. 골고루 잘 먹이시고, 유산균이랑 비타민도 처방할 테니까 아침마다 먹이세요."


홍 교수는 어려운 용어와 약 이름을 랩처럼 빠르게 처방했다. 심지어 나와 보조교수를 번갈아보며 말하는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토피는 부모 숙제라더니 약 처방을 받고서야 실감 났다. 아기는 스스로 약을 챙겨 먹거나 바르지 못한다. 전적으로 양육자가 관리해줘야 한다. 특히 아침에 챙겨야 할 게 많았다. 출근 전 육아는 내 담당이므로, 결국 엄마 숙제만 한가득이었다.


나는 선생님한테 혼난 학생처럼 우울해졌다.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서 보충 과제를 잔뜩 받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내가 제대로 케어하지 못한 벌을 내 아이도 함께 받고 있었다. 민준이는 내 아들이라서 아토피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내가 온습도를 조절해주지 못해서 증상이 더 심해졌다. 어른인 나도 아토피가 심해지는 여름엔 가렵고 짜증 난다. 하물며 스스로 긁지도 못하는 6개월 아기는 얼마나 가렵고 힘들었을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민준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눈시울이 빨개졌다. 아직 병원이기에 울지 않으려고 감정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얼른 차로 돌아왔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민준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약봉지는 뒷좌석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병원에 체류한 지 벌써 5시간이 넘었다. 나는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서 집까지 운전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친정엄마에게 연락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토피 관리를 나 혼자 하기엔 역부족이다. 아침저녁 약 바르기는 출퇴근 전후로 남편과 내가 나눠서 하겠지만, 낮 시간엔 불가능하다. 출근하는 엄마아빠를 대신해 줄 할머니의 도움이 절실했다.


"병원 잘 다녀왔니? 의사가 뭐래? 민준이 아토피 맞대?"


집에 도착했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만큼 민준이를 걱정하는 따뜻한 목소리. 엄마 전화를 받자마자 내내 눌러왔던 서러움이 북받쳤다.


"엄마, 민준이 아토피래. 나한테 유전됐나 봐. 나 민준이한테 너무 미안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요새 아토피가 뭐 큰 병이라고. 그거 크면서 괜찮아진다. 너도 어릴 적엔 엄청 심했는데 지금은 괜찮잖아."

"몰라, 너무 미안해. 의사가 집이랑 피부가 건조해서 더 심해진 거라고 내가 관리 잘해줘야 한대. 약이랑 관리법 엄청 받아왔어."

"혼자 애 데리고 병원 갔다 오느라 고생했다. 오늘 휴가지? 처방받은 약 들고 집으로 와. 엄마도 알아야지. 그래야 민준이 봐주면서 같이 관리해 주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내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감이 엄마와의 전화 한 통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를 어떻게 케어할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했지만, 엄마가 도와주면 어떻게든 잘 되겠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나는 민준이와 약봉지를 그대로 들고 다시 차를 몰아서 친정으로 향했다. 울기 직전인 내 표정 보고, 엄마는 등짝을 때리면서 말했다.


"너랑 네 동생들 전부 아토피였던 거 내가 싹 다 고쳐줬다. 민준이 한 명 보는 건 일도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나는 의사보다 엄마의 말에 더 안심했다. 긴장이 풀리니까 줄곧 어렵게만 느껴지던 온습도와 처방 가이드가 갑자기 쉬워 보였다. 나는 한껏 편안해진 마음으로 엄마와 함께 병원 가이드를 공부했다. 늙고 젊은 엄마 둘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와중에도 귀여운 아기 민준이는 세상 편한 얼굴로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4.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그날 저녁, 나는 쿠팡으로 로션 열 통을 주문했다. 민준이의 생활 동선에 따라서 집 거실, 서재, 침실에 한 개씩 배치하고 친정집에도 3개 보냈다. 남은 로션은 안전 보급품으로 친정과 2개씩 나눠가졌다. 눈에 보일 때마다 발라주겠다는 각오도 함께 나눴다.


남편은 가습기를 주문했다. 가습력이 제일 좋다는 유명 화식 가습기에 거금을 투자했다. 항상 가성비를 외치는 남편이었는데 이번엔 가격이 아니라 제품력만 따졌다. 그의 달라진 모습이 놀랍고 든든했다. 남편의 통 큰 결제는 마치 '나도 함께 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는 소리 없는 결의로 들렸다. 남편은 혹시 모를 진드기를 잡겠다며 아기 이불을 빨고 침실 대청소까지 했다. 든든한 우군의 활약상을 바라보면서 나는 자신감에 고무됐다.

 

나는 약 처방을 전담했다. 남편보다 출퇴근 시간이 여유 있어서 아침저녁 약 바르기에 용이했고, 직접 교수 면담을 하고 왔기에 복잡한 처방전 내용에도 이해도가 높았다. 우리는 기저귀 갈이대 옆에 약 테이블을 새로 만들었다. 아침 기상과 밤잠 시간에 맞춰서 유산균과 비타민을 먹이고 부위별 연고를 꼼꼼히 발라줬다. 어른들은 이렇게 노력하는데, 민준이는 그저 귀찮다며 약 바르는 손길을 피하려고 떼를 썼다.


"가만히 좀 있어봐, 원래 예뻐지는덴 노력이 필요한 거야!"


도망가는 민준이를 붙잡으면서, 어른들은 각자 약과 로션을 바르고 따뜻한 물로 통목욕을 시켰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봄기운이 만연한 4월, 우리는 숙제 검사를 받으러 다시 아산병원을 찾았다. 이번엔 남편도 함께 왔다. 두 번째 방문이라서 벌써 익숙해진 건지, 지난번처럼 진료 대기가 힘들지 않았다. 기왕 연차를 냈으니 진료 끝나고 어린이대공원 나들이를 가자며 신나게 얘기했다. 30분 정도 기다렸을까? 민준이 면담 차례가 되었다.


"민준이 많이 좋아졌네요. 팔다리 접히는 부분은 아직 아토피 증상이 좀 남았는데, 건조하지 않게 로션만 잘 발라주면 점점 나아질 거예요. 등이랑 배는 깨끗해졌네요. 이 정도면 약한 약으로 바꿔도 되겠어요. 엄마 아빠가 고생 많이 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나와 남편 그리고 할머니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 민준이의 건강한 피부를 지켜냈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친정 엄마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렸다. 엄마는 그것 보라며, 아기는 세포가 신선해서 금방 낫는다고 자신이 옳았음을 과시했다. 나는 손뼉을 치면서 역시 엄마가 최고라고 호응했다. 뿌듯한 성과에 어른들은 모두 기뻐했다.


숙제를 마친 당당한 학생의 표정으로 우리는 아산병원을 나왔다.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벚꽃 봉오리가 화단 가득 피어있었다. 옅은 분홍색 꽃망울 뒤로 하얀 뭉게구름과 파란 하늘도 보였다. 모두가 설레는 봄이었다.


"오빠, 우리 공원 가기 전에 맛있는 거 먹자. 나 배고파."

"그래! 오랜만에 빕스나 갈까? 민준이 먹을 것도 있으려나."

"수프에 밥 말아서 이유식으로 주면 되지. 과일도 있고."

"그럼 얼른 가자! 평일 점심이니까 사람도 별로 없겠지? 이제 휴가 좀 즐기자."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면서 눈을 반짝였다. 놀 생각에 빠진 아이의 표정이었다. 나도 똑같은 표정으로 민준이를 안고 보조석에 탔다. 오늘은 민준이도 예쁜 외출복 차림이다. 보람찬 병원 일정을 끝마치고서, 우리 가족은 봄철 성수기를 맞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떠났다. 따뜻한 봄 날씨, 참 놀기 좋은 월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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