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마케팅팀 나우나우입니다.
6개월의 육아휴직을 무사히 마치고 복직하여 인사드립니다.
덕분에 건강한 아들을 출산해서 9kg까지 잘 키웠습니다.
앞으로 A 브랜드 마케팅 관련 업무는 제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우나우 드림.
2022년 3월, 출산/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했다. 내 생애 가장 길고 강렬했던 6개월이었다. 쌓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모두 생략하고 짧은 복직 신고 내용으로만 이메일을 썼다. 수신처는 마케팅, 국내영업, 해외영업, 영업기획, 학술, 홍보, 물류팀 등 약 100여 명. 그들과 다시 연결됨으로써 나는 회사에 공식적으로 복귀한다. 설레고 후련하고 의욕적이었다. 무사히 사회로 돌아왔다는 기대감에 부풀면서도 한편엔 친정집에 남은 아이와 엄마한테 미안했다.
아니, 사실은 설레고 신나는 마음이 가장 컸다. 출산/육아휴직을 냈던 지난 6개월 동안 세상은 나만 빼놓고 빠르게 돌아갔다. 나 없이 어떡하냐며 걱정하던 팀장의 문의 전화는 휴직 이주일만에 끊겼다. 사내 메신저와 아웃룩엔 내가 잘 모르는 회사 및 업계 이슈가 쌓여갔다. 안부 인사 혹은 경쟁사 동향 확인 차 매일 연락하던 동종 업계 지인들의 연락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10년 차 직장인이자 한 회사 과장으로서의 내 존재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이대로 영영 없어질까 봐 무서웠다. 그럴 리 없다고, 6개월 뒤 사무실의 내 자리는 그대로일 거라고 되뇌었지만 과연 나 스스로의 업무 내공도 그대로일지는 자신 없었다. 회사 내 최고라고 자부하던 업계 지식, 최신 시장 정보와 분석력이 아직 내 안에 있을까? 그렇게 자신하기에는 거울 속 내 모습이 너무 초라했다. 피부는 푸석하고, 다크서클이 완연하고, 산후 탈모로 머리숱은 볼품없었다. 10년 경력의 커리어우먼은 온데간데없었다.
아기를 낳고서야 내 적성을 깨달았다. 나는 일을 해야 살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먼저 반짝반짝 빛나야지만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날 닮은 아기가 너무 예쁘고 소중하지만, 나 스스로를 키우는 자아실현 역시 내겐 너무 중요했다. 엄마와 직장인을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옵션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워킹맘이 되기로 결심했다.
슈퍼우먼이 되고자 나는 불효녀를 자처했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겼다. 어린이집보다는 같은 핏줄인 할머니의 돌봄을 구하는 것이 엄마로서의 내 모정이었다.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애꿎은 입술만 물어뜯다가 어렵사리 운을 띄웠다.
"엄마, 나 다음 달에 복직하잖아. 그래서 민준이 어린이집 연장반 등록했어. 오전 7시 반부터 저녁 7시 반까지 맡길 수 있대. 그래도 일주일에 며칠만 엄마한테 맡겨도 될까?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하루종일 어린이집에 있을 민준이를 생각하면 불쌍해서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
말을 끝내자마자 엄마는 별 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해? 당연히 엄마가 봐주려고 했어. 아직 걷지도 못하는 6개월짜리를 불쌍하게 어떻게 어린이집에 보내겠니. 엄마/아빠 둘 다 은퇴해서 이제 시간도 많잖아. 민준이 엄마가 봐줄 거야. 걱정하지 마"
감히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모정과 헌신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로 30년 넘게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은퇴했다. 한평생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우리 삼 남매까지 키우느라 손가락부터 허리 마디마디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그런 엄마한테 차마 손자까지 봐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었다. 그건 자식이자 사람으로서의 양심과 도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자를 맡기겠다는 못난 자식을, 엄마는 변함없는 모정으로 받아들여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은 너무 가벼웠다. 그 어떤 단어로도 엄마의 희생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었다. 말없이 울먹거리는 나를 엄마는 웃으면서 꼭 안아줬다. 엄마의 눈에 비친 나는 여전히 민준이와 똑같은 어린아이였다. 그것이 고맙고 안심되어서 나는 한참을 엄마 품에 안겼다.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도 불효자가 되기를 각오했다. 시댁 역시 같은 동네에 살았으므로, 친정에 일이 있을 땐 시댁에 아이를 부탁했다. 어렵게 운을 떼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시어머니 역시 자애로운 웃음으로 남편과 손자를 받아주셨다. 양가 할머니의 희생으로 엄마/아빠는 출근하고 아이는 안전과 사랑을 보장받았다. 기쁨과 설렘 그리고 고마움. 나는 밝고 따뜻한 감정을 등에 업고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나는 워킹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