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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Apr 10. 2023

육아 우울증과 정신과 진료


1. 코로나 불면증



생애 첫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한밤 중 자꾸 깨는 아이를 돌보는 것에 지쳐서 거실 소파에 앉았을 때, 창문을 보고 다 끝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무서워서 내린 결정이었다. 밤새도록 인터넷에서 '육아우울증' 검색했다. 가장 빠른 해결방법은 정신과 상담과 약 복용이었다. 나와 가족 모두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직감했다.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서 집에서 가깝고 후기가 좋은 병원을 찾아서 예약했다. 다음 날 퇴근 후 병원을 찾았다.


"우울증 초기입니다. 불면증, 우울감, 무력감 등 여러 증상이 동반될 수 있어요. 설문조사 결과로는 불면증이 가장 심하네요. 최근에 잠을 잘 못 주무시나요?"


잠을 제대로 못 잔 지 한 달쯤 됐다. 뒤늦은 유행으로 내가 코로나에 걸렸고, 그런 엄마와 와이프를 따라서 아이와 남편도 코로나에 전염됐다. 11개월 아이는 밤새 40도에 가까운 열로 힘들어했고 남편은 40도가 넘는 고열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내가 육아를 전담하면서 밤잠을 설쳤다. 일주일 뒤 열이 내리고 자택 격리도 해제됐지만 아이는 여전히 밤에 자주 깼다. 엄마인 나도 같이 깨어나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랬다. 다만 다시 잠드는 아이와 달리 엄마인 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졸리고 피곤하지만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불면증이었다. 새벽에 혼자 소파에 앉아서 많이 울었다. 그러길 벌써 한 달째라고, 나는 울면서 의사에게 고백했다.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잠드는 걸 도와주는 수면유도제예요. 수면제는 아니기 때문에 아기가 울면 바로 깰 거예요. 칭얼대는 아기를 재운 후, 엄마도 다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도와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시고 애기 잘 때 같이 주무세요. 잠이 정말 중요하죠."


의사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약을 처방해 줬다. 본인도 두 아이의 아빠라면서, 아이가 자랄수록 점점 더 좋아지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개인적인 조언도 덧붙였다. 진료가 끝나고 데스크에서 수면유도제 이주일치를 처방받았다. 괜히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서 약뭉치를 받자마자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2. 육아 우울증,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고 말하자, 이를 듣는 남편의 표정이 복잡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도와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꼭 병원까지 가야겠냐는 우려가 보였다. 남편의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진료를 통보하듯 말한 것은 내 나름의 메시지였다.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랐고, 이런 상태라서 미안하다는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약을 먹으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 남편은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투로 대답했다.


"알겠어. 오늘 퇴근하고 가는 거지? 이따 저녁에 맛있는 거 사 올게.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자."


그리곤 나를 꼭 안아주고 먼저 출근했다. 그 뒷모습에 미안해서 울컥했지만, 곧바로 아기 깨는 소리가 들려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엄마를 찾으면서 울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고 짜증 났지만 심호흡을 하며 꾹 삭였다. 조금만 더 참자고, 병원만 다녀오면 곧 나아질 것이라고 위로하며 우는 아이를 달랬다.


아침 8시,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지하철을 탔다. 아이를 등원시킨 후의 출근길은 항상 러시아워(Rush hour)다. 머리가 어질 하고 눈이 따가웠다. 사람들 사이에 끼였기에 망정이지 널럴하게 탔다가는 쓰러졌을 것이다. 끼인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상상했다. 쾌적한 사무실에 앉아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 그래 차라리 출근이 낫지, 육아보단 일하는 게 훨씬 낫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힘겹게 출근했다. 엄마보단 직장인 역할이 더 익숙하기에 차라리 회사가 맘 편했다. 육아보단 할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쏟아지는 일을 노련하게 쳐냈다. 점심도 맛있게 먹고 팀 동료들과 즐겁게 웃으며 지냈다. 내가 우울증이란 사실을 가족 말곤 아무도 모르길 바랐다. 우울증은 오직 육아에만 국한돼야 한다. 엄마 노릇만 미숙할 뿐 회사원 역할엔 능숙해야 한다. 회사에서의 나는 여전히 밝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저녁 6시, 다시 엄마로 돌아갈 시간이다. 정시 퇴근하고 예약한 병원으로 향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육아 우울증 진료 후기를 찾아봤다. 많은 사람들이 육아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특히 여유 시간이 부족한 워킹맘들은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서 빠르게 좋아졌다는 후기가 많았다. 나만 유별난 게 아니라서 안심됐다. 바쁜 현대인에겐 마음의 독감 같은 것이라는 문구가 특히 공감됐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병원에 도착한 후,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설문조사를 했다. 우울증의 심각함 정도를 판단하기 위한 검사였다. 나는 잠을 잘 못 잔다, 나는 요즘 무기력하다, 나는 평소보다 더 피곤하다, 최근 짜증을 잘 낸다 등 설문 문항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평범한 내용이었다. 역시 현대인은 다들 어느 정도 우울증을 갖고 있구나 안심하면서 최대한 솔직하게 응답했다. (하지만 죽음을 종종 생각한다는 문구를 봤을 땐 등골이 섬뜩했다. '난 그 정도까진 아니야'라며 재빨리 '아니오'에 체크했다.) 설문을 끝내고 잠시 대기하다가 담당 의사를 만났다.


"선생님의 최근 일상은 어떤가요?"


의사의 질문에 나는 11개월 아기를 키우는 워킹맘이라고 대답했다. 의사는 '11개월 아기'와 '워킹맘' 두 단어만으로도 이미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키보드를 빠르게 타이핑했다. 그리곤 다시 질문했다.


"많이 힘드시죠?"


너무나 일상적인 질문에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전문가가 보기에도 내가 많이 힘든 상황이구나, 이렇게 힘든 것이 정상이구나 싶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굳이 정신과까지 왔고, 전문가의 공인된 진단 아래서 맘껏 울고 싶었나 보다. 의사는 휴지를 뽑아 건네면서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상담을 이어갔다.


"아빠랑은 다르게 엄마는 아이가 어릴수록 잠을 잘 못 자요. 사람 신체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엄마는 힘들어요. 잠을 못 자니 피곤하고, 피곤하니까 무력하고 우울해지죠. 선생님 잘못이 아니고 아이 잘못도 아니에요. 그냥 선생님이 맡은 역할이 너무 크고 중요해서 그만큼 무거운 거예요. 힘든 게 당연합니다."


위로 같은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울음을 그치자 의사는 더욱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히 우울증이 심하진 않습니다. 불면증으로 인한 우울증 초기 단계라고 보시면 돼요. 잠만 잘 자면 해결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선생님도 잘 주무실 수 있도록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수면제가 아니니까 안심하고 자기 전에 꼭 챙겨드세요. 아기가 잘 땐 엄마도 같이 잔다고 생각하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잠이 안 온다면 차라리 확실히 깨는 게 낫다며, 의사는 각성제도 함께 처방해 줬다. 밤에는 수면유도제, 아침엔 각성제. 두 가지 약을 복용하면서 이주일을 지내보고 경과를 살펴보기로 했다. 진료실을 나오니 이미 데스크에서 이주일치 약을 조제해 놨다.


'정신과는 약국이 아니라 병원에서 바로 약을 주는구나.'


사려 깊은 효율성에 감탄하면서 수납하고 병원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남편과 함께 햄버거를 먹으면서 병원 상담 내용을 얘기해 줬다. 남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다. 나는 이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한 거라고 말하면서 처방받은 수면유도제를 한 알 먹었다.



3. 알약 한 알의 기적



그날 밤, 아이는 어김없이 칭얼대며 나를 깨웠다. 칭얼대는 방법은 다양하다. 무서운 꿈이라도 꾼 듯 '으앙!'하고 크게 울 때도 있고, 혹은 '엄마?' 하며 내가 옆에 있는지 감시하기도 한다. (없거나 혹은 아빠가 있으면 배신감에 치를 떨며 '엄마!'하고 크게 운다.) 청각이 예민한 나는 아이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옆을 보니 아이가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었다.


'또 시작이구나.'


벌써 똑같은 상황을 겪은 지 한 달째다. 밤새 최소 한 번, 많으면 3번 이상 자다 깨서 엄마를 찾는다. 오늘 밤은 몇 번이나 깰 것인가? 한숨을 크게 쉬고 아이 등을 토닥였다. 아이는 한참을 낑낑대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나도 얼른 자야지. 약까지 먹었는데 바로 잘 수 있으면 좋겠다.'


베개를 고쳐 베고 누웠다. 평소와 달리 눈이 편하게 잘 감겼다. 여느 때처럼 눈꺼풀이 살짝 벌어져서 억지로 감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눈이 자연스럽게 감기면서 시야가 깜깜하게 차단됐다. 이따금 들리는 남편의 코골이와 아이의 숨소리가 규칙적인 하모니로 들렸다. 하모니는 ASMR(백색 소음)이 되어서 머릿속 잡생각을 없애줬다. 마음이 고요하고 편해졌다. '약 기운인가.. 평소랑 다른데?'라고 생각하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아이는 밤새 3번 넘게 깼다. 그때마다 나도 같이 깨서 아이를 달래고, 재우고, 다시 잠드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런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졸린데 애가 자꾸 깨우니까 피곤하고 짜증 나네'라는 상태로 스트레스받다가 결국 잠이 깨서 혼자 울었을 것이다. 이번엔 달랐다. '아, 또 깼네. 졸린데 얼른 재우고 나도 다시 자야지' 정도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유지됐다. 스트레스가 없으니 잠도 잘 왔다. 숙면까진 아니어도 오랜만에 밤잠다운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의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피곤해서 잔뜩 인상을 찌푸린 남편과 달리 나는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일어났다. 머리가 개운했다. 통잠은 못 잤지만 머리가 어지럽거나 몸이 쑤시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그냥저냥 괜찮은 상태랄까? 불면증에 걸리기 전, 정상인으로 아침에 기상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육아 상황은 그대로인데 그걸 느끼는 내 감정만 변한 것이 신기했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거실로 나와서 물을 한 잔 마셨다. 그 사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잘 잤어? 어제도 민준이가 칭얼대는 것 같던데, 많이 피곤하지?"


머리가 맑으니 웃으면서 아침 인사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아냐, 민준이 재우고 나도 바로 잤어. 모처럼 잘 잤네. 오빠도 잘 잤어?"


남편은 의외의 반응에 놀라면서 좋아했다.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하는 사이 나도 세수와 양치를 하고 깔끔해진 모습으로 남편을 배웅했다. 잘 다녀오라며 뽀뽀도 했다. 이렇게 화목하고 순조로운 아침은 오랜만이다. 조금 뒤 칭얼대며 일어난 아이에게도 자애롭게 웃어주었다. '민준아' 이름 부르면서 품에 꼭 안았다. 엄마가 평소완 다르다고 느꼈는지 민준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내게 편안하게 안겼다. 아이 머리서 정겨운 냄새가 났다.



4. 엄마의 숙면으로 가족의 평화를 되찾다



아침의 기분 좋은 출발은 평탄한 회사 생활로 이어졌다. 와이프이자 엄마로서 육아 효능감이 좋아지니 직장인 페르소나도 밝고 활기차졌다. 집에서 회사로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높아진 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넓어졌다. 덕분에 회사 일이 술술 잘 풀렸다.


밤잠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퇴근길의 즐거움도 되찾아주었다. 잠을 잘 자니 체력이 회복되었고, 늘어난 체력만큼 퇴근 후 뭔가를 해보겠다는 의지가 높아졌다. 좋은 와이프와 자상한 엄마 노릇을 한 이후에도 내 개인 활동을 즐길 만큼 에너지가 남았다. 드라마 '미생'에서 말하길 뭔가 이루고 싶은 일이 있으면 체력을 먼저 기르라고 했던가? 행복한 일상을 이루고 싶다면 그만큼의 잠과 체력이 꼭 필요하단걸 새삼 깨달았다. 깨달음은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운 저녁 식사와 화목한 여가 생활로 이어졌다. 다시 찾은 평범한 일상이 참 반가웠다.


병원 진료를 받은 지 어느덧 이주일이 지났다. 수면유도제도 딱 맞춰서 떨어졌다. 각성제는 하나도 먹지 않았다. 약이 잘 듣는 체질인지 혹은 수면유도제 하나만으로 충분했는지, 지난 이주일동안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었다. 정말로 불면증이 개선됐는지 궁금해서 다시 병원을 찾았다. 여전히 아기는 밤에 칭얼대고 나도 잠을 설치지만 예전만큼 힘들진 않다고, 덕분에 아이에 대한 짜증도 많이 줄었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좋네요. 아이는 점점 더 성장할 거고 어느 순간부터는 밤에 안 깨고 잘 잘거예요. 그때가 돼서야 엄마도 푹 잘 수 있죠. 결국 육아는 시간이 답입니다. 그렇지만 답을 안다고 해서 문제풀이가 덜 힘든 건 아니잖아요? 제가 처방해 드린 약은 엄마와 아이가 건강하게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성장하는 시간이 덜 고통스럽도록 돕는 보조제입니다. 보조제는 말 그대로 거들기만 할 뿐, 선생님의 불면증 개선은 궁극적으로 선생님 스스로가 이뤄낸 성과입니다. 약 때문이라고 폄하하실 필요 없어요. 잘하고 계십니다."


전문가의 칭찬에 자신감이 고무됐다. 감기 때문에 목 아프고 열나서 고생하다가 약을 먹고 점점 나아지는 기분이랄까? 약은 증상을 완화하는 보조제일뿐 결국 감기를 이겨내는 원동력은 나 자신의 회복력이니까. 불면증도 마음의 감기처럼 느껴졌다. 진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방엔 수면유도제 이주일치가 들어있지만 처음 처방받았을 때처럼 부끄럽지 않았다. 이 모든 노력이 나는 물론 우리 가족 모두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것이다. 부끄럽긴커녕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당당한 마음으로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 PS. 수면유도제는 두 달쯤 먹었다. 한 달 반쯤 됐을 때, 혹시 하는 마음에 주말에 약을 안 먹고 자봤다. 약 먹은 것과 똑같이 푹 잘 수 있었다. 그다음 날엔 반 알만 먹어보고, 일주일 뒤부턴 아예 약을 안 먹었다. 그 사이에 아이는 조금 더 자랐고, 밤에 3번 깨던 것이 1~2번으로 줄어들었다. 편안한 밤잠은 쭉 이어졌다. 두 달 동안 아이와 함께 나도 성장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정답을 향해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조만간 정답에 다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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