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우나우 May 04. 2023

육퇴(육아퇴근)하고 책 쓰기


1. 자기 계발의 추억



워킹맘 1년 차의 목표는 생존이었다. 출산/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복귀해서 무사히 제자리를 찾아 적응하는 것, 즉 직장인으로 살아남는 것이 워킹맘 첫 해의 목표였다. 다행히 목표를 달성했다. 6개월짜리 젖먹이를 친정엄마와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과 육아를 넘나드는 극한의 노동을 견디면서 얻어낸 성과였다. 눈물겨운 결실을 축하하며 새해를 이틀 앞둔 12월 30일 저녁, 오랜 시간 천천히 반신욕을 즐겼다.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멍해지면서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렸다. 지난 한 해의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땀과 함께 배출됐다.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내자, 문득 내년엔 어떻게 살면 좋을지 자기 성찰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2023년 새해 목표는 무엇인가? 여전히 생존일까?


'아등바등 생존만 하는 건 재미없어. 좀 더 발전적인 목표는 없을까?'


아이를 낳기 전, 항상 자기 계발 의지로 충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공부든 운동이든 미래의 성장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활기차고 자신감이 차올랐다. 매일매일이 즐겁고 새로웠다. 워킹맘이 된 지금, 비록 그때보다 시간과 체력은 부족할지언정 무언가 도전해 볼 수 있을까?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을까?


한 조각 떠오른 의욕이 걷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번졌다. 막연한 생각 끝에 글쓰기가 떠올랐다. 육아휴직 때 시작했던 브런치(블로그)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핸드폰 화면에 켜져 있던 인스타그램에 '글쓰기'와 '브런치'를 검색했다. 수많은 게시물이 나타났다. 글쓰기 강좌가 이렇게 많았구나, 온라인 수업이면 나도 들을 수 있겠구나 감탄하는 와중에 한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자아실현적 책 쓰기 - 6주 동안 글 쓰고 자기 이름으로 책 내기'


글ego라는 단체에서 진행하는 공동출판 프로그램이었다. 9명의 초보 작가들이 신춘문예 등단작가의 코칭을 받으면서 단편 글을 써내면, 그 글을 모아서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프로젝트다. 기막힌 타이밍에 딱 맞는 광고를 만나니 이것은 운명이라고 느껴졌다. 그 자리에서 수강료 59만 원을 결제했다. 직장인도 엄마도 아닌 '작가 나우나우'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고 싶었다. 미래의 더 나은 나를 위해서 참가비 59만 원쯤을 기꺼이 투자했다.


아들의 신생아 시절, 잠도 못 자면서 익숙지 않은 육아에만 전념할 때 우연히 브런치 글쓰기를 알게 됐다. 매일 새벽마다 글을 쓰고 읽으면서 산후우울증을 달랬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지만,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아직 출산 전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던 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복직한 이후로도 글쓰기를 계속했다. 회사, 결혼, 육아 등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던 모든 에피소드를 글로 적었다. 언젠가는 책으로 엮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아직 부족한 실력을 알기에 조용히 혼자만의 계획으로 간직했는데, 누군가 내 욕망을 읽고서 딱 맞는 프로그램을 짜준 것만 같았다. 벌써 내 책이 나온 것 마냥 가슴이 콩닥콩닥 설렜다.


남편에겐 매주 일요일마다 2시간씩 글쓰기 수업을 듣겠다고 말했다. 책 쓰기 수업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부끄러웠고, 나중에 책이 나왔을 때 짠하고 놀래켜줄 생각이었다. 남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며, 황금 같은 주말에 공부하기를 자처하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도 그런 내가 신기하고 기특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2. 주말 책 쓰기 수업



수업은 등단 소설가 현해원 작가의 강의와 지도로 진행됐다. 첫 날인만큼 문우(文友)이자 공동 집필자인 참가자들의 자기소개로 시작됐는데, 나이와 직업을 밝히지 않고 오직 자신의 성격과 취미 그리고 글쓰기 주제만 가지고 얘기해야 했다. 나이와 직장을 빼고 나를 소개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현재 가장 관심 갖는 화두와 글쓰기 주제를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나우나우입니다. 저는 회사 일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에세이를 쓰려고 합니다. 직장보다 개인의 꿈이 우선시 되는 대퇴사 시대지만, 저는 회사만큼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을 지키면서 돈을 주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과 팀으로 함께 일하는 것도 좋고요. 회사원의 장점과 매력을 알게 된 에피소드를 글로 써보려고 합니다. 이번 수업을 기회로 개인적인 일기를 넘어서 남에게 보이는 글쓰기를 배우고 싶습니다."


에세이 주제는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착안했다. 총 8개의 단편 소설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익숙한 풍경에서 의미 있는 감정과 메시지를 찾아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장류진 작가의 시선으로 산다면 일상의 매 순간이 특별하고 즐거울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가진 페르소나 중, 가장 익숙한 것을 글쓰기 주제로 골랐다. 회사원. 내 노력으로 얻은 첫 번째 페르소나이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역할인만큼, 솔직한 생각과 감정으로 표현할 자신이 있었다. (브런치 글 중에서 가장 호응이 좋았던 주제이기도 했다.) 가장 평범한 보통의 삶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총 6번의 수업은 '자신만의 글쓰기'를 위한 과정이었다. 1~3회 차엔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본인의 에세이 초고를 완성했고, 4~5회 차에는 제출한 초고를 바탕으로 현해원 작가의 1:1 피드백 및 참가자끼리의 조별 합평으로 이뤄졌다. 6회 차 마지막 수업은 이미 퇴고한 글을 바탕으로 공동집필 책의 제목과 디자인 방향을 논의했다. 최종 합의된 내용을 글ego에 전달하면, 약 2달 뒤 예쁘게 인쇄된 책으로 받을 수 있었다.


A4 10장 분량의 초고 작성을 위해서 매일 밤 육퇴(육아퇴근) 후 노트북과 씨름했다. 첫날 호기롭게 자기소개할 때만 해도 이미 대략적인 개요를 완성한 줄 알았는데, 막상 하얀 워드 파일을 마주하니 숨이 컥 막혔다. 희미한 생각의 단편을 명료한 문장으로 이끌어내서 다듬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갈 땐 직장생활에 대한 에세이를 읽거나, 글쓰기 주제의 모티브가 된 '일의 기쁨과 슬픔' 소설책을 필사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회사 출퇴근길 독서로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수집하고, 점심시간과 육퇴 후 밤 시간엔 글쓰기에 집중했다. 어떻게든 한 문장 혹은 내일 쓸 글의 아이디어라도 적고 잤다. 정말 오랜만에 시도한 자기 계발인데 중간에 포기하기 싫었다. 두 달 뒤, 내 손에 쥐어질 책의 감촉과 감동을 상상하며 자주 괴롭고 가끔 즐거운 글쓰기를 이어나갔다.


가장 재밌는 수업은 합평이었다. 같은 초보자끼리 원고 피드백이 가능할까 싶던 우려와는 달리, 나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시각을 가진 독자의 시선으로 내 글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현해원 작가님의 1:1 피드백은 마치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처럼 바짝 긴장되는 수업이었지만, 참가자들끼리의 합평은 친구들과 수다를 나누는 듯 편하고 즐거운 놀이였다. 독자 눈높이에 맞는 단어와 문장 표현 검토엔 합평이 더 도움 됐다. 전체적인 글의 구조와 맥락은 현작가님의 피드백을, 단어와 문장 표현의 자연스러움은 합평 피드백을 기반으로 에세이를 퇴고했다.


최종 원고는 제주도에서 완성했다. 최종본 제출일이 가족여행과 겹쳤기에, 신나게 놀다가 모두가 잠든 새벽이 되면 5성급 리조트 비즈니스 PC센터에서 원고를 다듬었다. 이미 여러 번 봤건만 볼 때마다 어색한 문장과 오타가 발견됐다. 보다보다 질려서 나중엔 뒤에서 앞으로 거꾸로 읽어가며 오타를 확인했다. 원고 마감일 밤 10시 35분, 아쉽고 후련한 마음으로 최종본을 제출했다. 쥐어짜도 더 이상 나올 게 없었다. 혹여 부족한 문장이 남았다면 이게 나의 현재 실력이라고 생각하며, 홀가분하게 PC센터를 나왔다. 한 밤중에도 리조트 로비는 밝고 화려했다. 이제야 진짜 휴가를 맞이한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로비를 지나 방으로 향했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3. 출판, 나도 너도 별하



달의 시간이 흘렀다. 에세이를 제출했을 때의 충만감이 흐려질 즈음, 오랜만에 프로젝트 단체 카톡방 알림이 울렸다.


'도서 제작이 완료되어 배송될 예정입니다. 책은 yes24, 알라딘, 네이버 도서 등에 출판되며, 전자책으로도 제작되어 교보문고와 밀리의 서재에 등록됩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인세는 추후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도서, 출판, 인세. 보기만 해도 가슴 뛰는 세 단어가 모두 내 것이라니! 잠시 잊고 있던 글쓰기의 열정과 희열이 생각났다. 출퇴근길과 점심시간 그리고 육아퇴근 후 혼자 있는 모든 시간을 쪼개서 책을 읽고 글을 썼었다. 논리는 부실하고 생각을 표현할 어휘력은 빈약해서 괴로웠지만, 어떻게든 에세이를 써보겠다는 일념으로 글쓰기를 지속했다. 마침내 퇴고 후 원고를 제출하는 순간은 기쁘고 짜릿했다. 그 모든 기억이 생각났다.


'드디어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오는구나!'


아주 오랜만에 자기 계발의 성취감을 맛봤다. 당분간 나와 인연이 없는, 아들 민준이가 최소 초등학교는 들어가야 되찾을 줄 알았던 즐거움이었다. 책이 잘 팔리건 말건, 내 글이 호평을 받던 악평을 받던 상관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이 책으로 출판된다는 것, 부족하나마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사무실 의자를 한껏 뒤로 젖혀서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기분 좋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스스로 이룩한 자기 성장의 기쁨을 천천히 그리고 진하게 만끽했다.


며칠 뒤, 내 몫의 책 1권이 집으로 배달됐다. 따뜻한 파스텔톤의 파란 하늘 위를 형형색색의 별들이 수놓은 아름다운 표지. 제목인 '별하'는 별처럼 높고 빛난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다. 이 책에 담긴 9개의 이야기처럼, 우리 모두 각자의 삶으로 빛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 달 만에 다시 읽어본 에세이는 회사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젊은 날의 진심이 어설프지만 솔직한 문장으로 적혀있었다. 어색만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뜨끔할 만큼 부끄러웠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내가 이런 표현을 해냈다니!'라며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다른 수강생들의 글도 찬찬히 읽어보았다. 서로 다른 이야기와 목소리지만 결국 전하려는 메시지는 비슷했다. 우리 모두 '더욱 성장할 나 자신'을 희망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꿨다. 언젠간 각자의 이름을 건 책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책은 딱 두 명에게 보여줬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두 사람, 34년을 함께 지낸 여동생과 3년을 같이 산 남편에게 내 이름이 적힌 책을 자랑스레 내밀었다.


예술과 스토리텔링을 사랑하는 영화감독 여동생은 책을 다 읽어본 후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줬다.


"책 잘 읽었어. 나우나우가 회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구나. 이야기 재밌었어. 잘 간직했다가 민준이 크면 물려줘~"


책보단 게임과 운동을 사랑하는 남편은 책 표지만 보고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오, 나우나우 책 나왔네! 이거 제주도에서 쓰던 그거지? 이제 작가 나우나우네, 축하해~"


역시 첫 책의 감동은 작가 본인이 가장 크고 진하게 느끼나 보다. 이번 책은 공동집필이었으나, 생각을 다듬고 글쓰기 실력도 더욱 키워서 미래엔 내 이름으로 된 단행본도 내보고 싶다. 그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보여줄 만큼 훨씬 자신 있고 당당한 '작가 나우나우'로 성장했길 바란다.



4. 워킹맘의 자기 계발: 글쓰기



책 쓰기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도 '워킹맘'을 키워드로 글쓰기를 이어갔다. 육아휴직 복귀 1년 차에 느꼈던 초보 워킹맘의 고군분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직장인과 엄마를 넘나드는 극한 일상이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워킹맘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기쁨과 행복도 존재했다. 날 닮은 아들의 육아는 마치 또 다른 나 자신의 재탄생을 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고, 그 와중에도 현실의 '나우나우'는 직장과 사회에서 계속 성장했다. 일과 육아의 병행은 과거 어떤 자기 계발보다도 훨씬 더 크고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줬다. 내가 느낀 보람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 특히 결혼과 출산을 앞두고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워킹맘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오늘도 나는 육퇴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책을 읽고 글도 면서 평범한 일상 속의 특별한 감정과 생각을 끄집어내려 노력 중이다. 잘 정리하고 보관해서 훗날 어른이 된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너를 키우면서 힘들지만 정말 행복했다고, 이렇게 큰 기쁨을 줘서 고맙다고 말할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선물로 남겨주기 위해서 문장도 여러 번 고쳐 쓰고 글쓰기 수업도 들어보며 열심히 포장해 본다.


올해 목표였던 '자기 계발로 충만했던 나우나우 되찾기'는 성공했다. 남은 한 해 동안, 자아실현 책 쓰기를 넘어서 일상 속의 기쁨과 슬픔 모두를 글로 써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워킹맘이 되어서 새롭게 찾은 취미를 앞으로도 즐겁게 지속하고 싶다. 기왕이면 내 글이 나와 가족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분 좋은 영향을 주면 좋겠다. 평생의 자기 계발 목표로 삼아야겠다.

이전 06화 육아 우울증과 정신과 진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