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이집으로부터의 연락, 아이가 아프다
'민준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습니다ㅠㅠ 얼굴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키즈노트 알림장에 담임 선생님 코멘트가 올라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코감기가 좀 나아져서 일주일 만에 어린이집에 등원한 날이었다. 어제저녁에 36.8도 정상 체온을 확인했고, 오늘 아침에도 분명 꺅꺅 거리며 밥도 잘 먹고 기분 좋아했는데.. 모처럼 등원한 어린이집 일정이 많이 피곤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키즈노트에 올라온 사진 속 표정도 평소보다 어둡다. 우리 아기, 많이 힘들었구나..
사무실 분위기를 살피고 팀장님한테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보냈다.
'팀장님, 혹시 내일 재택근무해도 될까요? 애기가 열이 나서 자택보육해야 하는데 친정/시댁이 모두 일정이 있어서요. 내일 미팅이나 외근은 없습니다.'
팀장님은 그러라고 할 것이다. 업무 결과만 잘 챙기면 굳이 사무실 근무를 고집하지 않는 성향이니까. 하지만 재택 신청을 할 때마다, 특히 육아 문제일 때는 괜히 마음이 무겁고 조마조마하다. 워킹맘의 극성으로 보일까 봐 무섭다.
'네, 그러세요.'
팀장님은 흔쾌히 승낙했다. 외국계 회사라서 근무 제도가 비교적 자유롭고 유연한 편이다. 싱글일 때도 좋았지만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이후로는 필수불가결한 근무 조건이 되었다. 덕분에 코 찔찔 흘리는 우리 아기는 어린이집에 꾸역꾸역 등원하는 대신 편안한 집에서 하루종일 엄마와 함께 지낼 수 있다. 팀장의 답신을 받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아기에게 그리고 남편과 다른 가족 모두에게 참으로 다행이다.
2. 워킹맘의 고뇌
추측컨대, 민준이가 감기에 걸린 것은 지난 주말 시아버지 생일잔치였을 것이다. 모처럼 햇볕이 따뜻했던 2월 토요일 점심, 우리 세 식구는 구리 한정식집에서 시댁 가족을 만났다. 시아버지의 63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고급진 코스요리를 주문하고, 전날 미리 주문한 떡 케이크를 꺼내서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 민준이는 아버님과 어머님 사이로 파고 들어서 제일 신나게 손뼉 치며 케이크 촛불을 껐다. 졸지에 생일 주인공을 꿰차버린 불효 손자지만, 시부모님은 그 모습마저 예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나와 남편의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올라왔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가족이었다.
즐거움을 더 길게 누리고자 우리는 식당 건너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시어머니는 민준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스무디를 주문하셨다. 모처럼 여유있게 커피를 마셨다. 민준이는 시어머니 무릎에서 신나게 스무디를 먹었고, 실증 나서 칭얼대면 시아버지나 남편이 목마를 태워서 밖으로 놀러 나갔다. 약간 쌀쌀한 바람이 걱정됐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어른과 아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차마 막을 수 없었다.
깜깜한 밤이 오고 즐거운 시간은 끝났다. 민준이가 누런 콧물을 훌쩍이며 심하게 칭얼대기 시작했다. 안아 올린 몸이 뜨끈했다. 혹시나 하고 체온을 재보니 역시나 37.8도 미열 상태였다.
'하아.. 다음 주는 망했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부디 일요일 하루 만에 열이 내리는 기적을 바랐지만, 내게 돌아온 건 냉혹한 현실이었다. 일요일 저녁, 민준이는 38.2도의 감기 환자가 되었다. 급하게 친정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 민준이 감기 걸린 것 같아. 열이 나서 내일 어린이집 못 갈 것 같은데, 친정으로 데려가도 돼요?"
"또? 지난 감기 나은 지 2주밖에 안 됐잖아."
"요새 코감기가 유행이래. 나 내일 회의가 있어서 휴가나 재택근무 신청하기 좀 그렇단 말이야."
"할 수 없지, 뭐. 내일 아침에 여기로 데려와. 소아과가 몇 시에 열더라.."
든든한 할머니가 있어서 나도 민준이도 참 다행이다. 급한 불을 끄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곤 곧바로 속상해졌다. 오늘도 나는 62살 엄마에게 육아 노동을 떠넘기는 불효녀가 되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회사에 복직한 이후, 민준이의 주양육자는 나와 친정엄마 두 명이 되었다. 낮에는 엄마의 도움으로 어린이집을 등하원하고, 퇴근 후 밤이 되어서야 친정으로 아기를 찾으러 간다. 하루 24시간 중 내가 민준이를 제대로 마주하는 시간은 아침저녁 겨우 3시간. 이래서야 내가 애엄마라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아픈 애를 떠넘기는 내가 엄마여도 괜찮은 걸까? 오늘 밤도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이를 친정에 데려다주고 출근했다. 오전 10시에 주간회의, 오후 1시에 마케팅PM 회의까지 마치고 녹초가 되어서 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을 여니 카톡 메시지가 쌓여있다. 소아과에 도착/퇴장했다는 굿닥 어플 메시지, 주식이 떨어져서 슬프다는 남편의 메시지 등 여러 소식 중 제일 먼저 엄마한테 온 메시지를 열었다.
'민준이 코감기랜다. 당분간 어린이집 보내지 말래. 콧물약이랑 해열제 처방받았어. 의사가 모레 또 오래.'
한숨만 푹푹 나왔다. 이로써 내일/모레까지 민준이는 집에 있어야 한다. 급히 이번 주 일정을 확인했다. 내일 오후 거래처 미팅, 모레 오전 신규입사자 제품 교육, 오후엔 전무님 1:1 면담.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정만 한가득이다. 다시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며 걱정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란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로부터 3일 후, 민준이는 할머니의 큰 사랑을 받고 다시 건강해졌다. 아직 콧물을 조금 흘리지만 열은 다 내렸다. 언제 아팠냐는 듯 맘마도 배가 볼록해질 때까지 먹고 우다다 잘 뛰어다녔다. 소아과 의사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며 다시 어린이집에 가도 되겠다고 말했다. 씩씩하게 이겨낸 아기가 기특했고, 그런 아기를 만들어준 우리 엄마한테 너무 고마웠다.
"겨우 나았는데, 주말에 또 아파서 데려오면 이젠 안 봐준다."
엄마는 웃으면서 눈을 흘겼다. ‘엄마 고마워’를 외치며 아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코가 덜 막혀서 기분 좋은지 쌔근쌔근 잠든 민준이의 얼굴이 정말 예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와서 남편과 맥주 한 잔 하며 얘기했다. 양가 식구들이 한 동네에 살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우리 부부는 정말 복 받은 엄마아빠라고. 우리는 함께 웃으며 민준이처럼 기분 좋은 얼굴로 잠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자신감 넘쳤다. 양가 부모님의 든든한 뒷배 아래서, 다정한 엄마와 유능한 직장인 두 가지 역할 모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1시, 어린이집 키즈노트 알림장을 받기 전까지는.
'민준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았습니다ㅠㅠ 얼굴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더라고요.'
아직은 친구보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을 걸까? 아이가 아프다는 메시지에 마음이 저릿하게 미어졌다. 분명 아침 어린이집 문 앞에서 헤어질 땐 환하게 웃으면서 엄마 빠빠이도 했는데.. 사실 힘들었나 보다. 알림장 사진 속 민준이가 누런 콧물을 흘리고 있다. 코감기가 다시 도졌나 보다. 코가 막혀서 얼마나 숨이 찼을까? 연신 콧물을 들이켜느라 얼마나 머리가 아팠을까? 엄마가 일 욕심에 눈이 멀어서 내 새끼 아픈 것도 몰랐구나. 민준이에게 너무 미안해서 당장이라도 어린이집으로 뛰어가고 싶었다. 사진 속 퀭한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감정이 북받쳐서 얼른 화장실로 뛰어갔다. 간신히 눈물을 삼키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날 대신해서 불쌍한 내 새끼를 꼭 안아줄 사람이 누구지? 단 한 명이 생각났다.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 민준이가 아프대.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알림장 왔어. 혹시 4시 전에 하원시켜 줄 수 있어?"
"아이고 좀 나아졌나 했더니 아직이구나. 그래, 엄마가 이따 3시쯤 가서 데려올게."
"엄마 고마워.. 혹시 내일도 봐줄 수 있어? 열나서 어린이집에 못 보낼 것 같아."
"어떡하지? 엄마도 내일은 약속이 있는데.. 혹시 사부인한테 부탁할 수 있을까?
바로 남편한테 전화했다. 민준이가 아픈데 혹시 시어머니한테 내일 하루 부탁할 수 있을지 여쭤봐달라고. 전화를 끊고 5분 만에 남편한테 연락이 왔다.
"어쩌지? 우리 엄마도 내일 약속이 있대. 난 내일 개발물 테스트 날이라 휴가를 못 내는데.. 혹시 나우나우는 낼 수 있어?"
"다음 주 가족여행 때문에 벌써 이틀 연차 냈잖아. 업무 미리 해놔야 해서 나도 힘들어. 눈치도 보이고.."
"어떡하지.. 내가 엄마한테 다시 말해볼게."
"아냐, 그러지 마 오빠. 내가 재택근무 신청할게."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공식적인 재택근무제도는 없어졌지만, 행사 때문에 주말 출근이 잦은 마케팅 특성상 팀장 재량으로 가끔씩 비공식적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 형식보단 자율과 책임을 중요시하는 사내 문화 덕분이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직원 모두가 좋아하지만, 특히 나 같은 워킹맘에겐 대체 불가능한 복지 혜택이다. 오늘 같은 천재지변 날벼락에서 날 구원해 줄 한 줄기 빛이다.
자리로 돌아와서 팀장님에게 메시지를 썼다. 아이가 아파서 부득이하게 재택 신청한다는 간절함과 급한 업무도 문제없이 처리하겠다는 책임감을 모두 담았다. 메시지에 담긴 정성을 팀장도 읽었는지 흔쾌히 그러라는 회신이 왔다.
'아, 정말 다행이다.'
안도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묵직한 사명감을 그 자리에 채웠다. 민준이 엄마로서는 다행이지만 마케팅팀 과장으로서는 더욱 정신 차려야 한다. 육아의 고됨이 절대로 회사 일에 영향을 줘선 안된다. 워킹맘을 내서워 복지를 누렸으니 나도 성과로써 보답해야 한다. 다른 싱글이나 딩크 직원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업무에 몰두했다.
3. 육아 재택, 회사보다 집이 더 전쟁이다
민준이와 함께하는 재택근무 날 아침이 밝았다. 누워만 있던 어린 아기 시절에는 몇 번 해본 적 있었지만, 이렇게 뛰어다니는 어린이가 된 이후로는 처음이다. 설렘보다는 잔뜩 긴장됐다. 아침 7시,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재빨리 세수와 양치를 했다. 서재 겸 놀이방을 대충 정리하고 책상 위에 회사 노트북을 셋팅했다. 인터넷 보안을 연결하는데 침실에서 엄마를 찾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우리 아들이 일어났다.
"우리 민준이, 잘 잤어? 오늘은 엄마랑 하루종일 함께야. 우리 아기 좋지?"
갓 일어나 퉁퉁 부은 얼굴마저 사랑스럽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내 품을 파고든다. 평소 같으면 얼른 잠 깨라고 손발을 만져줬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 없다. 남은 겉잠 천천히 마저 잘 수 있도록 조용히 머리를 받쳐 안고 소파에 앉았다. 한참을 품에 안겨 있더니 가슴께에 얼굴을 마구 부비면서 슬슬 잠에서 깨어났다. 얼굴을 들어 엄마임을 확인하고는 에엥거리면서 어리광을 피운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볼때기에 쪽쪽 뽀뽀했다. 보드라운 바닐라향 아기 냄새가 났다.
"우리 아기 잠 좀 깼어? 엄마랑 물 한 모금 마시자."
코가 막혀 입으로 숨을 쉰 건지 목이 아파 보였다. 컵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서 입에 갖다 대니 목이 말랐다는 듯 꿀꺽꿀꺽 받아마신다. 지금 시간 7시 50분. 9시 출근 전까지 기저귀 갈기, 맘마 먹이기, 응가 치워주기 3종 세트를 마쳐야 한다. 밤 사이 오줌 싼 기저귀를 갈면서 허벅지와 종아리에 로션을 넉넉히 발라줬다. TV에 핑크퐁을 틀어주고 이유식과 물 한 컵 그리고 물티슈 여러 장을 챙겼다. 핑크퐁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집중할 때면 도망 안 가고 무릎에 잘 앉아있는다. 하지만 아기의 집중력은 길어야 20분. 신속하게 이유식을 한 숟갈씩 먹였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유식이 너무 뜨겁지 않도록 입으로 후후 잘 불어서 줘야 한다는 점이다. 급하다고 막 먹이다간 뜨거움에 분노한 아기가 푸-하고 온 사방에 밥알을 흩뿌릴 수 있다.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고 청소기를 돌렸더니 애기 엉덩이에서 쿠리쿠리한 냄새가 올라왔다. 모닝 응가다. 세면대에서 따뜻한 물로 닦아주고 새 기저귀와 내복을 입혀주면서 출근 전 육아가 모두 끝났다. 여기까지는 평소 루틴인 만큼 별 힘들이지 않고 40분 만에 완벽히 수행했다. 평소라면 이제 아이를 들고 친정이나 어린이집으로 등원하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핑크퐁을 다른 버전으로 틀어준 뒤, 나는 회사 노트북 앞에 앉았다. 18개월 아기와 함께하는 재택근무가 이제 막 시작됐다.
띵동 하고 이메일 수신 알림이 울렸다. 지난달 가격인하 전후 매출 트렌드를 분석해 달라는 팀장님의 이메일이다. 재작년부터 이번 달까지의 매출 엑셀 자료를 다운로드하였다. 월별 트렌드를 볼까 아니면 분기로 나눌까, 매출 금액을 볼까 아님 거래처 수 통계를 내볼까 고민하는 찰나에 '엄마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핑크퐁이 지겨워진 민준이가 퉁퉁퉁 뛰어왔다.
"우리 민준이 핑크퐁 다 봤어요? 그럼 이제 블록 놀이 해볼까?"
옆의 놀이매트 위로 블록을 쏟아줬다. 민준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퀴 모양 블록을 손에 쥐어주고 엄마 빠방 자동차 만들어달라는 미션을 줬다. 아기가 새로운 놀이에 열중한 사이 나는 다시 엑셀에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래도 거래처 수 트렌드를 보는 게 낫겠다. 1월은 비수기라서 매출 데이터로 돌리면 긍정적인 결과가 안 나오겠어.'
작업 방향을 결정하고 신중하게 엑셀 업무에 돌입했다. Sumifs, countifs, vlookup 등 내가 아는 엑셀 함수를 총 동원하는 고난이도 작업이다. 민준이의 인내심을 고려하면 최대 20분 안에 통계 한 꼭지는 만들어야 한다. 각오를 다지며 작업을 시작하려는 찰나, 와르르 블록 흩트리는 소리와 함께 민준이가 들이닥쳤다.
"엄마아- (멍멍이 그림책을 가져오며) 멍무!"
제일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 달라며 내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읽어달라는데 차마 뿌리치진 못하겠다. 그래, 책 한 번 읽어주고 이번엔 타요버스를 틀어주자.
"~멍멍! 멍멍! 강아지가 엄마를 찾았어요. 끝, 피니쉬! 민준아! 이제 우리 타요 친구들 보러 갈까?"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타요버스 에피소드를 틀어주고 그릇에 까까도 듬뿍 담아서 손에 쥐어줬다. 나는 다시 엑셀 작업에 열중했다. 10분쯤 지났을까, 거실에서 와르륵 장난감 바구니 뒤엎는 소리가 났다. 그래, 혼자서 장난감 갖고 놀겠다는데 얼마나 기특하냐 생각하며 나는 노트북 화면에만 집중했다. 뭔가 집어던지는 소리, 어디선가 뛰어내리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지만 다쳐서 우는 소리만 아니면 된다며 나가보지 않았다. 30분쯤 뒤, 드디어 엑셀 작업이 끝났다. 다행히 지난달 가격인하 이후 월평균 거래처 수가 증가하는 추세였다. 현재까진 긍정적인 시그널로 보이며 추후 지속적인 분석으로 정확한 트렌드를 파악해 보겠다고 팀장 이메일에 회신했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봤다.
"민준아, 우리 아기 뭐 하고 놀고 있.. 어..?"
난장판. 눈앞의 광경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였다. 장난감이 사방팔방 흩뿌려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까까 부스러기가 널려있다. 서랍장은 죄다 열려서 안의 내용물이 여기저기 섞이거나 혹은 전혀 다른 곳에 던져졌다. 물컵은 엎어져서 안의 내용물이 모두 쏟아졌다. 민준이는 그 위에 앉아서 물을 찰방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눈앞의 난장판과 타요버스 노랫소리가 어우러져 정신을 쏙 빼놨다. 머리가 어질 했다. 당황한 채 서있는데, 그런 엄마를 발견한 민준이가 반갑다고 달려왔다. 대체 어딜 갔다 이제 왔냐고, 칭얼대며 안아달라고 팔을 벌린다. 오은영 교수는 육아를 함에 있어서 절대 감정적으로 아이를 대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TV로 볼 땐 나도 꼭 그렇게 해야지 다짐했었건만, 막상 현실로 맞닥뜨린 상황에서 나는 그저 감정의 노예가 됐다.
"양민준 이게 뭐야! 왜 엄마를 힘들게 해!"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반가움에 엄마한테 달려왔건만 왜 엄마는 화를 내지? 어리둥절 삐죽거리는 아이의 슬픈 표정을 보면서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죄책감이 몰려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를 품에 꽉 안았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민준이 안 미워하고 사랑한다며 뽀뽀를 해줬다. 착한 민준이는 금세 엄마를 용서하고 다시 활기차게 집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낮잠을 잤다.
폭풍 같은 오전을 보내고 드디어 나도 휴식 시간. 남은 반찬으로 대충 요기하고 어질러진 거실을 치웠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잠시 멍하니 창 밖을 봤다.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 이렇게 금방 정리할 것을 괜히 애한테 짜증이나 내고.. 다시 미안해진 마음에 잠든 아이를 살피러 침실로 갔다. 아이는 어제보다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잘 자고 있었다. 열도 가라앉고 콧물도 덜 난다. 기분 좋게 쌔근쌔근 잠든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와 함께하는 재택근무가 정말 힘들지만 그래도 하길 잘했다는 뿌듯함으로 더없이 행복해졌다. 나는 민준이를 마주 보고 옆에 누웠다. 아이가 내쉬는 숨소리에 맞춰서 나도 숨을 받았다가 내쉬었다. 후식으로 먹은 상콤한 딸기 냄새가 났다. 냄새마저 사랑스럽다. 하얗고 포동한 딸기향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다시 서재의 일터로 돌아갔다.
민준이는 오후 3시까지 2시간을 푹 잤다. 나는 체력이 풀 충전된 아이와 함께 다시 전쟁 같은 오후를 보냈다. 전투는 격렬했다. 평화/방임/난장판/짜증/화해가 똑같이 되풀이됐다. 저녁 7시 30분, 퇴근한 남편이 돌아와서야 전쟁은 겨우 끝났다. 우리 집은 다시 평화로워졌다.
4. 나는 재택근무 덕분에 아이를 키웠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이는 건강을 되찾았다. 열은 완전히 내렸다. 아직 콧물이 약간 나지만 누렇지 않고 맑은 색이다. 이 정도 건강함이면 어린이집 등원하기에 충분하다. 잘 회복해 준 민준이가 너무 기특하다. 역시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최고지? 힘들었지만 재택근무하길 잘했다며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그러나 잠시 뒤, 이제 어린이집으로 가야 하는 아이를 생각하고는 다시 착잡해졌다. 다시 엄마와 떨어져야 하는 아이도 불쌍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회사로 출근하고 싶은 내 마음의 모순됨이 착잡했다. 육아 책에서 읽기를, 행복한 엄마 밑에서 행복한 아이가 자란다고 했다. 내 행복은 집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나는 집 밖으로, 사회로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집과 회사를 오가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엄마인데, 이런 나의 행복도 아이에게 잘 전달될까? 복잡한 마음으로 어린이집 가방을 챙겼다.
"민준아, 엄마 회사갔다 올게. 우리 아기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재밌게 놀다가, 이따 다시 만나요?"
순간 민준이의 눈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금세 체념한건지 멍한 표정으로 엄마 빠이빠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다시 미어졌지만, 애써 웃는 얼굴로 나도 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울지 않는게 어디냐며 돌아서서 출근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오전엔 일이 참 잘됐다. 어제 보고했던 매출 트렌드 분석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팀장님은 마케팅과 영업 임원들을 참조에 넣어서 전체 이메일 회신했다. 새로운 정책 결과가 현재까진 매우 긍정적이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매월 대시보드(Dashboard, 마케팅 목표 달성과 관련된 정보를 보여주는 시각 자료)로 공유하겠다는 내용이다. 업무 성과를 인정받은 것은 기쁘지만 매월 할 일이 늘어난 것은 슬펐다. 어찌 됐건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일은 확실히 해낸다고 증명했다. 사무실에서 내 존재감이 조금 커졌다. 나는 한껏 고무됐다.
오후 한 시, 어린이집 키즈노트에 알림장이 도착했다. 알림장 사진 속 민준이는 활짝 웃으면서 친구들과 함께 블록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 민준이 컨디션이 참 좋다는 담임 선생님의 코멘트를 보고 내 얼굴에도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재택근무의 성과는 매출 트렌드 보고서뿐만이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의 건강한 웃음 역시 더없이 큰 실적이다. 뿌듯한 마음을 못 참고 친정과 남편에게 카카오톡으로 자랑했다.
'양민준 건강 완전 회복. 장난꾸러기 이즈 컴백.'
어린이집 사진을 채팅방에 공유하고 잠시 사무실 의자에 기대앉았다. 점심시간 직후라서 그런지 사무실 공기가 한가했다. 본격적인 오후 업무에 앞서서 커피를 마시며 웹서핑 중인 동료가 보였다. 한시 반 회의를 앞둔 팀장은 관련 자료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느슨한 긴장과 적당한 여유가 어우러진 이 공기를 나는 사랑한다.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며, 그렇게 결정한 과제는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 혹은 완료한 과제가 쌓일수록 회사와 사회에서의 내 존재감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스스로를 증명하며 성장시키는 이 과정이 재밌다. 나는 직장인으로 사는 것이 참 좋다.
키즈노트를 켜고 사진 속 민준이를 유심히 다시 봤다. 환한 웃음을 포함한 갖가지 표정이 어제 집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그곳에 엄마는 없지만, 민준이와 똑같은 크기의 친구들이 있고 엄마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놀아주는 선생님도 있다. 오후 4시가 되면 엄마만큼 민준이를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원해서 손수 만들어주신 맛있는 이유식도 먹을 것이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다가 저녁 7시 즈음에 다시 엄마 아빠를 만나면 된다. 낮에 꾹꾹 눌러 담아 온 엄마 아빠의 사랑을 잠들기 전까지 전부 나눠줄 거다. 민준이는 분명 행복하게 웃을 것이다. 일하는 엄마와 다복한 아이는 그렇게 둘 다 행복할 수 있다.
아침보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워킹맘의 아이라서 남들보다 불행할 거라고 괜히 스스로 위축될 필요 없다. 짧은 육아휴직을 끝냈을 때, 친정 엄마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일하는 엄마 아이 걱정할 필요 없다. 엄마가 없을 땐 알아서 자기 복을 다 찾아온다. 너도 그렇게 컸다. 걱정 마라.'
할머니, 할아버지, 선생님과 친구들. 우리 아이는 자기 몫의 복을 야무지게 모았다. 분명 엄마인 나보다 훨씬 더 잘 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