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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나우 Jun 01. 2023

30대 중반 워킹맘의 꿈


1. 아들이 내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야?"
첫째 아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내게 와서 갑자기 물었다.

- 손유리 작가 '이제 겨우 엄마가 되어 갑니다' 중


책을 읽다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문장을 발견했다. 손유리 작가의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간 후 '나의 꿈과 장래희망'에 대해서 배웠나 보다. 까마득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어른인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이 뭐야?"


아이의 질문에 손유리 작가가 아닌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작 어른이 된 이후론 한 번도 깊게 고민해보지 않은 질문이다. 대학생땐 어디로든 취업하느라 적성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취업을 한 이후엔 경력 쌓느라 바빴고, 자기계발은 영어나 마케팅 같이 회사 일과 관련된 것에만 치중했다. 연애할 땐 몸도 마음도 마냥 꽃밭이었고, 결혼해서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일상은 그 자체가 꿈이자 목표였다. 출산 후 워킹맘이 된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오늘내일을 버티느라 그 이후의 미래까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이의 성장, 함께 늙어가는 남편 그리고 팀장이 된 회사원으로써의 내 모습 정도만 상상될 뿐, 그 이상을 고민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꿈과 장래희망은 내일보다 훨씬 더 먼 미래 향한다. 어떤 제약이나 한계도 없이 자신의 순수한 흥미가 꿈의 기준이다. 아직 현실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일수록 문이과와 예체능을 넘나드는 장래희망을 꿈꾼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아들도 곧 그럴 것이다.


"엄마는 꿈이 뭐야?"


까맣게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질문하는 아들 민준이를 상상했다. 과거 시제를 모르는 나이니까, 엄마의 꿈은 무엇이었는지가 아니라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물어볼 것이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어떤 답을 해줘야 내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내 어린 시절 꿈은 뭐였고 중간에 어떻게 흘러가버렸는가? 책을 덮고 사색에 잠겼다.



2. 30대 중반 워킹맘의 꿈



내 아들의 질문에 대비해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 봤다.


시나리오 1.

"엄마는 우리 민준이랑 아빠랑 다 같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게 꿈이야." 


진정성은 있지만 아들의 질문 의도와는 안 맞는 답변이다. 아들이 말하는 꿈은 개인의 노력으로 이룬 사회적 직업 혹은 성과를 뜻한다. 내가 어릴 적 배웠던 꿈과 장래희망도 그랬었다. 미래의 내 모습을 표현하는 초상화에 과학자나 게임 개발자를 그렸지, 가족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그리진 않았다. 그건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꿈이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약속된 미래의 모습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가족의 행복'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 꿈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겐 당연하게 주어져야 할 필요조건일 뿐이다. 부모로서 민준이에게 만들어줘야 할 마땅한 환경일 뿐, 일생일대의 노력을 요하는 꿈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시나리오 1번은 탈락이다


시나리오 2.

"엄마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어."


이 역시 진정성 면에선 합격이지만, 지금은 이루지 못한 과거형이라서 탈락이다.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과학자를 꿈꿨다. 대학교에서는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원 학 대신 회사 취업을 선택했다. 나는 짧고 굵은 집중력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선호하는 성향이었다. 반복되는 실험 실패를 딛고 긴 호흡으로 도전하는 학자 체질은 아니었다. 명예보단 재화를 더 좋아했다. 그래서 제약회사에 취업했고 지금은 과장급 마케터가 되었다. 눈에 띄는 행사를 개최하고 굵직한 숫자 성과도 만들었다. 내 선택은 옳았고 덕분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민준이에게는 현실과 타협하는 삶보단 어려서부터의 꿈을 실현시키는 낭만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래서 시나리오 2번도 탈락이다.


시나리오 3.

"엄마는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 민준이랑 같이 지내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회사에서 일을 잘 해내면 얼마나 기쁜지를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나중에 민준이도 읽어주면 좋겠어.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어."


남에게 밝히기 부끄러워서 속으로만 간직해 온 꿈이다. 아직은 실력도 부족하고 가시적인 성과도 없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도전만큼은 현재진행형이다. 나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엄마와 회사원 역할 수행에도 지장을 주지 않는다.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만큼 내 실력도 함께 자라서 우리 모두 꿈에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다. '엄마의 꿈'을 묻는 질문 답변으로 딱이다. 시나리오 3번으로 정했다.



3. 작가의 꿈



초등학생 때 글쓰기 상을 많이 받았다. 매일 수업 준비를 하느라 책을 끼고 살던 교사 부모님을 보면서 나도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로 자랐다. 처음엔 독서에 집중한 엄마/아빠의 모습이 멋있어서 따라 했는데, 책을 읽을수록 나도 점점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읽는 게 재밌으니 직접 써보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열리는 독후감 쓰기, 자연과학 글짓기 경진대회, 백일장 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정말 열심히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고만고만한 어린이들 경쟁에서 조금만 열심히 쓰면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잘했다는 칭찬과 상장이 쌓일수록 글쓰기는 점점 더 재밌어졌다. 내게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중학생 사춘기에 돌입하면서 독서와 글쓰기에서 멀어졌다. 온라인 게임과 만화책을 읽는 게 훨씬 재밌었다. 화려하고 번쩍이는 게임 화면은 고등학교를 넘어 대학교까지 나를 사로잡았다. 취업 전쟁이 목전에 닿은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다시 부랴부랴 책을 잡았다. 뭐가 되고 싶은지,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눈앞이 깜깜했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에 뭐라도 채워 넣어야 다. 자기 계발 책을 열심히 읽던 중, 1년에 100권씩 3년을 읽으면 사람이 바뀐다는 문구를 읽었다. 그대로 따라 했다. 자기 계발, 소설, 에세이, 인문서 등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책을 찾는 건 쉬웠다. 한 권을 읽으면 관련된 다른 책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우연인지 아니면 자기 계발 문구가 진짜였던 건지, 책 300권을 읽으면서 원하는 직장 취업에 성공했다. 독서가 다시 재밌어졌다.


회사원이 되면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서 회사 생활과 보톡스 업계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나와 가족에게 는 어른의 보람과 즐거움을 글로 적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를 남들에게 자랑하는 글이었다. 서툴지만 날 것의 느낌이 괜찮았는지, 글 세 개가 다음(Daum) 포털 메인에 걸렸다. 순식간에 조회 수 30,000회가 넘었다. 글쓰기 실력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러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 여리고 약한 신생아를 20개월 어린이로 키우고, 집과 회사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워킹맘 생활을 시작하면서 세상을 향한 시선과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밤새 제대로 못 자고 출근할 때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어서 발 끝까지 우울해졌다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성과를 낼 때면 '나 정말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자기 효능감이 차올랐다. 키즈노트 어린이집 알림장에 아이 사진이 올라오면 '내 새끼 정말 예쁘지' 하며 다시 만날 저녁 시간을 기다렸고, 퇴근 후 마침내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작은 일 크게 기뻐하고 큰 일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애엄마가 된 이후로는 희로애락의 감정 범위가 넓어져서 작고 큰 모든 일이 의미 있고 흥미로웠다. 사는 게 스펙터클 하고 재밌어졌다. 일과 가족, 두 가지를 모두 움켜쥔 삶이 행복하다.


내가 얻은 행복은 내 아들 민준이와 그를 둘러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하다가,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감사 편지를 정성껏 써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브런치 포스팅으로 발송했다. 편지 글은 '워킹맘 1년 생존기'에 대한 내용이다. 결혼과 출산 전, 내가 가장 걱정하던 미래는 바로 워킹맘 적응 첫 해였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회사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지 당장 목전에 닥칠 상황들이 무서웠다.


워킹맘 생활은 예상대로 힘들었다. 일상 스케줄과 감정이 모두 널뛰듯 정신없었다. 육아와 커리어,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었기에 잘하던 못하던 그냥 이 악물고 버텼다. 힘든 건 이 또한 지나갔고, 좋은 건 격하게 기쁘고 즐거웠다. 아이를 낳기 전엔(사실은 지금도) 맘충이니 노키즈존이니 무서운 단어들이 참 많았지만, 막상 아이를 안고 밖에 나가면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덕분에 엄마 된 것이 보람 있고 행복했다. 내 아들이 살아갈 미래는 훨씬 더 발전하고 좋아질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이 모든 경험과 감정을 글로 남기고 싶다. 아직 결혼/출산 전 후배들에겐 작은 희망이 되고 싶고, 이미 초등/청소년기까지 이룩한 육아 선배님들에겐 지난날을 추억하며 미소 짓게 할 책갈피가 되고 싶다. 훗날 엄마의 글을 읽게 될 아들 민준이에겐 더없이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나는 작가가 되길 꿈꾼다. 꼭 이루고 싶다.



4. 엄마와 아들, 우리의 꿈



출근길에 차로 아들을 친정집에 데려다주면서 가끔 노래를 불러준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OST '우리의 꿈'이다. 음악이 활기차고 가사도 미래지향적이라 아침을 시작하는 노래로 딱이다.


'우리의 꿈' 가사 중에 아래 내용이 있다.


말도 안 돼 고개 저어도.
내 안의 나, 나를 보고 속삭여.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용기를 내, 넌 할 수 있어.


가사를 흥얼거리다 가슴이 울컥 뜨거워질 때가 있다.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그럴 땐 나이 먹고 주책이라고 피식 웃다가도, 창 밖을 멀리 바라보면서 잠깐 사색에 잠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이 가사는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인 동시에 나 스스로에게도 말하고 싶은 메시지인 것 같다.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대학교 교정을 거닐던 기억이 생생한데, 어느새 30대 중반 애엄마가 됐다. 아이 키우랴 회사원 노릇 하랴 정신없이 바쁜 워킹맘에게 '꿈'이란 단어는 너무 몽환적이다. 꼭 이뤄내겠다는 열정보다는, 나도 예전엔 그런 게 있었지라는 추억의 아련한 눈빛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 날 쏙 빼닮은 아들이라도 꿈을 찾아 이루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준 건데, 아들뿐 아니라 나를 향한 응원으로 들렸나 보다. 


꿈을 찾으란 응원에 목이 메일 정도로 감동받는 아줌마라니, 청춘인지 주책인지 모르겠다. 매일 어린아이와 함께 웃고 떠들다 보니 내 마음도 다시 어려졌나 보다. 되찾은 청춘의 열정이 반갑기도 하고, 이제 와서 이걸 어쩌나 싶어서 난감하기도 하다.


고개를 돌려서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담겨있다. 맑고 순수한 눈빛과 마주치니 내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피었다. 웃음과 함께 어린아이의 밝은 희망까지 내게 전염됐다. 저 아이와 함께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든 해야겠다. 언젠가 내 아이가 맑은 눈빛으로 엄마의 꿈을 물었을 때, 당황해서 어버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도록. 막연한 공상 같은 꿈이 아니라, 정말로 이뤄지길 바라면서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진심 어린 답변을 해줄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 도 뭐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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