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1840~1897)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 책이 편지글로 이야기를 하듯 쓰인 것처럼 저도 독자님들께 편지를 쓰듯 써 봅니다.
처음에는 책장에 꽂혀 있는 2008년 발행된 알퐁스 도데의 <별>을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요즘 나온 알퐁스 도데가 궁금해져서 도서관에 가 <별들>이라는 제목을 단 연작소설집을 빌려왔습니다.2017년 새움출판사에서 발행한 이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 스물네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풍차방앗간의 매매계약서 형태로 쓰인 '서문'은 알퐁스 도데가 프랑스 남부지방인 프로방스 중심부, 론 계곡의 언덕 위에 위치한 제분용 풍차방앗간을 매매한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허구지요. 허구지만 이십 년 이상 방치되어 야생포도나무와 이끼, 로즈메리 등으로 뒤덮인 풍차 날개와 방앗간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실제인 듯 생생합니다.
알퐁스 도데, 하면 떠오르는 소설 '별'이 이 책에서는 '별들'로 번역되었어요. 별이 단수든 복수든 프로방스의 풍경과 밤하늘을 상상할 수 있는 목동의 이야기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다만 어릴 때 읽은 ‘별’이 그저 순수하고 낭만적으로 다가왔다면 나이 들어서 읽은 ‘별들'은 목동의 삶과 사랑에 대해 생각게 합니다.
목동이 스테파네트를 사랑하는 방식은 소유하고 욕망하는 사랑이 아니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사랑입니다.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을 넘어선 그 사랑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퇴색되지 않고 목동의 가슴속에서 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에서도 밝게 빛날 거라 생각됩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말이지요.
첫 번째 이야기 '정착'에는 풍차방앗간에서 바라본 프로방스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평선엔 알피유산맥의 삐죽하고 선명한 봉우리들이 들어서 있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숲을 이룬 언덕 위에 풍차방앗간이 서 있습니다. 라벤더 꽃 사이로 도요새가 보이고 길 가는 당나귀 방울소리도 들립니다.
프로방스에선 여름이 되면 가축들을 알프스로 보내는데 가축들과 더불어 사람들은 대여섯 달을 산속에서 보내고 가을의 첫 오한이 찾아들면 농가로 내려온답니다. 숫양이 앞서고 그 뒤로 어미 양들이 따르고 새끼 양은 바구니에 담겨 노새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양치기들과 개들이그 뒤를 따르겠지요.
알퐁스 도데가 묘사하는 프로방스의 자연은 아름답고도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에게 긴 여운을 남긴 이야기는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입니다.
프로방스 지방에는 미스트랄이라 부르는 강하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데 이를 이용해 언덕 위에는 풍차방앗간이 성행했답니다. 미스트랄 바람에 돌아가는 풍차 날개, 밀 포대를 실은 당나귀들이 줄을 서 풍차방앗간으로 가곤 했다지요. 풍차방앗간 덕분에 동네는 풍요로웠고요.
코르니유 영감은 육십여 년 동안 풍차방앗간을 운영하며 밀가루 속에서 산 늙은 방앗간 주인입니다. 그런데 파리에서 온 사람들이 증기 기관으로 돌리는 제분 공장을 지었지요. 아주 멋들어지고 신식이라 마을 사람들은 밀을 제분 공장으로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그 많던 풍차방앗간은 하나둘 문을 닫습니다.
코르니유 영감의 풍차방앗간은 견디며 버텼지요.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풍차방앗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영감은 점점 방앗간에 틀어박혀 살아갑니다. 존경받던 영감은 맨발에 구멍 난 모자를 쓰고 누더기 띠를 두를 정도로 가난해졌고요.
마을 사람 누구도 풍차방앗간에 밀을 가져가지 않는데 풍차 날개가 항상 돌고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였습니다. 더구나 영감은 언제나 방앗간 문을 잠그고 다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안을 쳐다볼 수 없어서 의문은 점점 증폭되었구요.
그러던 어느 날 영감의 손녀딸이 신랑감을 인사시키기 위해 코르니유 영감의 방앗간에 갑니다. 문은 잠겨있고 할아버지는 없는데 사다리가 보입니다. 궁금한 둘은 사다리를 타고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들이 본 방앗간은 텅 비어 있었지요. 휑한 방앗간은 먼지만 날리고 가난한 침대와 굳어 있는 빵 한 조각이 전부였지요. 터진 포대에서는 밀가루 대신 자갈과 하얀 흙만 흘러내리고요.
불쌍한 풍차방앗간은 빈 채로 날개만 돌고 있었던 거고 가련한 코르니유 영감은 저녁마다 당나귀 등에 밀가루 대신 횟가루 포대를 싣고 나와 풍차방앗간의 명예를 지키고 있었던 거지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손녀딸과 신랑감은 울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마을 사람들도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집에 있는 진짜 밀을 당나귀 등에 싣고 코르니유의 풍차방앗간으로 가져갑니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코르니유 영감의 풍차방앗간 일거리가 떨어지지 않게 보살핍니다.코르니유 영감이운명할 때까지 말이지요.
시대의 변화로 삶의 방식이 산업화 기계화 되면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은 설 곳을 잃게 됩니다. 코르니유 영감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던 자연적인 삶의 방식을 신의 뜻이라 여기며 온 힘을 기울여 풍차방앗간을 지키려 노력하며 살아간 사람입니다.
코르니유 영감이 풍차방앗간을 애정하는 태도와 지키고 싶어 한 마음이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켜 기계적 제분공장으로 가던 그들의 발걸음을 다시 코르니유 영감의 풍차방앗간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온 힘을 다해 무언가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은 뭇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이 책에는 알퐁스 도데가 여행한 코르시카와 알제리의 19세기 풍경과 풍물을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또한 여러 편의 이야기에서 다룬 프로방스의 풍경 묘사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문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이야기 속 여운은 길어서 마음속에 오래오래 되뇌게 됩니다.
알퐁스 도데를 통해코르니유 영감과 시인 미스트랄, 바구니에 들어 있는 새끼 양, 새끼 양을 바구니에 담은 노새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밀을 실은 당나귀의 방울 소리, 도요새들의 오케스트라, 박새들의 중창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프로방스 지방의 라벤더와 로즈메리 향기를음미할 수 있어서좋았습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공존하는 햇빛 가득한 언덕 위, 제 역할을 잃은지 오래된 풍차방앗간에서 글을 쓰는 알퐁스 도데 씨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까만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