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수동성을 생각하며

인생은 자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by 카후나

4년 연속으로 난임병원에서 캐럴을 들었다. 야속하게도 크리스마스이브마다 진료가 있었다. 명절이나 생일, 새해에도 난임병원에 가는 것은 괜찮았는데, 연말에 병원에 가는 게 힘들었다. 모두 들뜬 분위기에 나만 가라앉아 있어, 그게 더 잘 보여서 풀이 죽었다. 올해도 이렇게 끝나는구나, 패배감도 들었다. 병원 입구부터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면, 어떤 전조처럼 보였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크리스마스에 주사를 맞으며 보내게 될 거야.


병원 가는 일정을 내가 일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피했을 거다. 그런데 시험관 하는 인생의 일정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자궁이 정해준다. 생리 2-3일째 반드시 병원에 방문해야 하고, 그때 초음파, 피검사로 난소상태, 호르몬을 체크해야 다음 차수를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다. 주사를 받아와 생리 3일 차부터는 맞기 시작해야 하니, 그때 병원에 가지 못하면 다음 달로 미뤄야 한다. 생리 시작일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리 시작일, 내가 정할 수 없지 않은가. 상황이 이러니 없어도 될 스트레스가 추가되는 것이다.

“생활 전체가 시험관에 지배당한다. 병원에 자주 가야 하니 직장생활에 영향이 가고, 시간 맞춰서 주사를 맞고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여행 일정마저 시술 일정과 생리 주기에 맞춰야 한다.”

최가을, <결혼하면 애는 그냥 생기는 줄 알았는데>


한 번은 목요일 저녁을 먹고 생리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은 금/토 중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 그런데 토요일에 주치의 선생님 진료가 없다. 금요일 오전에 중요한 업무 미팅이 있었는데 그 미팅을 전날 저녁에 어렵게 취소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병원에 가서 당일 접수를 하고, 2시간을 기다려 진료를 봤다. 다른 것은 모두 괜찮았는데, 난소에 물혹이 생겼단다. 혹이요? 그거 무서운 거 아닌가요? 주치의 선생님은 흔한 일이고,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라고 하셨지만, 혹이라는 말에 놀랐다. 난소를 계속 자극하니 난소가 부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는데도, 혹이라는 말에 인터넷을 한참 뒤졌다. 중요한 일정까지 정리했는데, 다음 차수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별 일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뭐 하나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이렇게 없구나 무력감을 느꼈다.


난임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이야기 하는 주제가 영양제다. 코큐텐, 활성엽산, 이노시톨, 아르기닌은 기본이고, nmn, 식이유황, sod, 유비퀴놀 등. 영양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주치의 선생님께 물어보면 대부분 영양제 먹어야 효과가 없어요. 그냥 엽산만 드시면 돼요 하신다. 그런데도 이렇게 영양제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다. 그러다 7차쯤 되니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뭐라도 해보겠다는 마음. 노력을 하고 있어야 마음이 안심이 되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소고기/단백질 식사에 집착하게 되고, 아미노산 수액, 한방치료에 열심히인 것 아닐까 싶었다.


시험관을 하면서 삶의 수동성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인생에 얼마나 적은 것을 내가 결정을 할 수 있는지. 난자 채취를 하고 싶어도, 채취를 하고 나서 이식을 하고 싶어도 내 의지로 할 수가 없다. 운 좋게 배아를 이식했다고 해서, 착상이 될지, 건강한 임신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내 노력이 좌우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은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

그때까지는 무엇이든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고, 직장에서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승진도 하고 보너스도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임신하기로 마음먹은 뒤에,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다.

_ 앨리스 D. 도마, <기다림이 평화로울 때>


뭐든 열심히 하라고 배웠다. 능동적으로 하라고. 난임생활에도 이 마음으로 열성적으로 덤볐다가 자주 쓰러졌다. 왜 마음대로 되지 않냐고 화를 내며 살았다. 그러다 마음이 평화로운 날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내 노력으로 지금 살아있는가, 시험관을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신체를 가지게 되었나, 밝게 웃어주는 조카를 곁에 두고 살게 되었나. 그러고 보면 인생에는 아무 노력 없이 내게 주어진 것들 천지다.


뭘 더 주지 않는다고 바닥에 누워 떼쓰고 있는 애 같은 나에게 가끔은 어른스러운 말도 했다. 노력한다고 안 되는 것에 화만 낼 것이 아니라, 노력 없이 받은 것들에도 가끔은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1. 인생이 원래 그런 거야. 통제할 수 없는 것. 이게 뭐 특별한 상황이 아닌 거야.


2. 난소 물혹에 너무 기죽지 마. 정말 흔한 거야.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무서운 거 아냐.


3. 소고기, 단백질, 영양제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거라도 붙잡고 싶은 건 알겠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것, 너도 알잖아.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