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라일락이 피는 때가 제일 좋다.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 중에 '봄' 은 정말 강력하다.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치는 여름의 한가운데서도...
짙은 단풍에 묻혀 걷는 어느 가을날에도...
잎이 다 떨어져 나무의 민낯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겨울의 맹 추위 속에서도...
'봄'이라는 이 한 글자는 묘하게도 참 설렌다.
한반도 남쪽 섬진강변에서부터 매화꽃이 피어나고, 곧이어 벚꽃으로 전 국민이 들뜨는 계절.
도심 속 생활자들에게는 벚꽃 연금으로 유명한 노래 한 자락이 어디선가 들려오면 마음은 그저 울렁울렁 봄의 멀미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해가 제법 길어지고, 파릇한 새싹이 살살 살살 올라오는 초봄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5월쯤, 봄이 끝나갈 무렵이 좋다. 왜냐, 라일락 꽃봉오리들이 보라보라 하게 올라오면 곧 공기를 향기로 장악해버릴 그 향, 라일락꽃향이 굉장히 기다려지기 때문이다.
라일락은 학교 담벼락에서, 동네 울타리에서, 놀이터 주변 어디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꽃이 피고 향내가 뿜어져 나와야 비로소 '아, 너 거기 있었구나. 작년에도 여기서 널 봤는데...' 한다.
일단 라일락이 이렇게 향을 퍼트려주면 향 때문에도 기분이 좋지만, '어디, 올해의 첫사랑 맛보기 당첨자는 누가 될 거냐.'라는 생각에 좀이 쑤신다.
나의 계획은 이렇다.
편안하게 지내는 지인과 길을 걷는다. 라일락을 발견한다. 라일락 향에 대해 감탄하며 다가선다. 그윽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이런 멘트를 날린다.
'첫사랑의 맛을 확인하고 싶을 때, 라일락 잎을 따다 안쪽 어금니로 꽉 깨물어보면 바로 그 맛에 무릎을 탁 친다네요.'라고 한 후, 깨물기를 기다렸다가 지인의 반응을 즐긴다.
대체로 나의 악의 없고 나를 신뢰해주는 좋은 사람 유전자를 지닌 지인들은 기대 반 설렘반 묘한 표정을 잎을 따다 살짝 깨물어보았다가 지독한 첫사랑의 맛에 깜짝 놀라곤 한다.
전공 교수님을 따라 교정을 돌며 식물 관찰하던 때, 농담이라곤 할 줄 모를 것 같은 노교수님의 추억을 더듬는 듯한 그윽한 눈빛과 진지한 제안에 홀랑 속아 같이 수업 듣던 사람들과 라일락 잎을 꽉 깨물었었다.
'이게 뭐야' 싶었지만, 참 재미난 경험이었던 터라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전공내용은 뇌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버리는데, 이런 것은 두고두고 생생하게 매년 봄이 오길 기다리며 생각의 싹으로 틔워진다.
아, 벌써 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