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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Nov 07. 2024

수놓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무명의 여성들이 꽃피운 찬란한 예술 

  연일 폭염 경보가 울리던 한여름 한국 근현대 자수 전을 보러 갔다. 자수는 중학교 가사 시간 수예라는 이름으로 해 본 이후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애초 나는 가사 시간도 수예도 심드렁했다. 여자들이나 하는 시시한 집안일로 본 탓도 있고 사극 드라마의 규수들이 사모하는 선비를 그리며 얌전히 앉아 곱게 수 넣는 장면이 연상되어서이기도 했다. 겉멋 들린 중학생이던 나는 뭔가 대단하고 고뇌하는 것만이 예술이라 여겼고 자수는 예술이 되기엔 보잘것없고 빈약한 기술이라 생각했다. 어른이 된 지금 여성의 가사노동을 시시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여전히 공예보단 회화를 더 선호했다. 자수 전시를 가게 된 건 전시에 함께 갈 사람들이 오기 편리한 미술관을 고르다 보니 가게 되었을 뿐, 전시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그러나 전시실로 들어서자 나의 오만함은 단박에 깨졌다.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까지 자수 작품들을 총망라한 전시는 입이 떠억 벌어지게 압도적이었다. 한 올 한 올, 한 땀 한 땀 시간과 노동이 집약된 예술 작업인 자수를 바로 눈앞에서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와아’ ‘미쳤나 봐’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연신 내뱉었다. 밀도 높은 절절한 노동이자 우아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 앞에서 저속한 감탄 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자수를 창조적인 예술이 아닌 회화나 조각보단 한 단계 아래 치밀한 기예 정도로 여긴 내가 얼마나 남성 중심 예술관에 찌들어 있는지 선명하게 확인하는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며 수려하고 섬세한 자수 작품을 감상하는 중에 크게 인쇄해 세워 놓은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흑백 사진은 한눈에 봐도 여학교 자수 시간 같았다. 고개를 자수틀에 박고 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갈래 머리의 소녀들이 커다란 작업 책상 가장자리에 줄줄이 앉아있었다. 전시실에 적혀있는 설명글에는 일제 강점기 여성들이 미술을 공부해 화가가 되는 것은 집에서 반대했지만 대신 자수를 배우는 것은 허락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여자 미술 학교에서 자수를 공부한 엘리트 여성들이 고국에 돌아와 전국의 여학교, 기예 학원 등에서 자수를 가르쳤다고 적혀 있었다. 사진은 그 시기 어디쯤 어느 학교의 자수 수업 시간 같았다. 사진 뒤편 한복을 입고 서있는 젊은 여성은 자수를 자기 의지로 선택했든 혹은 화가를 반대하는 가부장과의 적당한 타협으로 선택했든 자수를 공교육의 영역으로 확대한 신여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여성 청소년들은 자수를 자기실현으로 경제적 자립을 위해 배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란 자수틀을 보면 아마도 병풍을 제작할 목적으로 자수를 놓는 사진 속의 저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솜씨 좋은 자수가가 되어 공방에서 일했을까? 아니며 자수 예술을 하는 작가가 되었을까? 자수를 가르치는 젊은 선생도 자수를 배우는 세일러 교복의 학생도 자기 삶의 주체성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로 수를 놓았겠지 상상하며 사진 앞에 오래 머물렀다. 


 감상하는 예술, 규방에서 제작되는 공예품을 넘어 여성의 삶 속에서 예술이 되고 밥이 되는 기술이던 자수는 여전히 미술사 변방에 위치하며 자수를 하던 여성들은 작가이든 기능인이든 몇몇을 제외하곤 무명의 장인으로 남았다. 사진 속 수놓던 그 소녀들 역시 그렇게 무명의 장인이 되었을까? 그러나 많은 여성 자수 예술가들, 여성 자수 기술자들이 꽃피운 자수 예술은 찬란하기만 하다. 여성의 예술을 배제한 남성 중심의 미술사, 그들의 전당에 오르지 않더라도 여성의 예술은 제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자수 예술에 흠뻑 빠졌다가 돌아온 날 나는 문득 예술이라 이름 붙인 나의 작업들이 세상에 기억되지 않더라고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 나의 삶을 나의 예술을 평가할 것인가. 나는 나인 채로 충분하다. 물론 그들의 미술사에 여성을 배제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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