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 맞추다 보면 내 삶 역시 타인의 시선 아래 두게 된다
점점 몸이 커지고 있다. 중년의 살이 붙어 몸피가 커지는 중인데 최근엔 급기야 ‘풍채가 좋다’라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을 듣고 깔깔, 아니 껄껄 풍채에 맞게 웃어 주었다. 나이가 든 지금에야 ‘풍채가 좋다’라는 말이 상처주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또래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그래서 엄마가 가장 많이 하던 소리는 ‘밥을 한 숟가락만 덜 먹어라’였다. 엄마는 늘 한 숟가락 더 먹고 싶을 때 숟가락을 놓으라고 했다. 이 말과 함께 많이 듣던 말은 여자애가 저렇게 커서 어떻게 하냐는 말이었다. 키가 크고 따라서 체격도 큰 내가 운동을 잘 할 것 같았는지 체육시간마다 불려나갔는데 느리고 둔한 내 동작을 보곤 체육선생들은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유별난 이름까지 가져 더 눈에 띄었다. 수줍고 내성적인 나는 내 이름도 부끄럽고 내 몸이 커다란 것도 다 부끄러웠다. 친구들보다 큰 몸을 줄여보려고 또래보다 성장이 빨라 커지는 가슴을 감추려고 늘 어깨를 웅크리고 다녔다. 왜 여자는 크면 안 되는 걸까?
‘한 숟가락만 덜 먹는’ 엄마의 훈육 덕분에 난 과식하지 않고 자라 적정 몸무게를 가진 보통 체격의 어른이 되었지만 내 머릿속에서 나는 늘 ‘큰 여자’였다. 그리고 큰 여자는 사랑받지 못하고 크고 나긋하지 못해 인기 없을 거라 여기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 생각은 나를 늘 수동적으로 만들었고 나의 연애전선에도 당연히 영향을 미쳤다. 나의 대한 상대의 호감을 지레 거절하고 연애감정 앞에서 쭈뼛거리기 일쑤였다. 나이 든 지금은 연애시장에 나를 전시할 일도, 그럴 마음도 희미해졌는데 이젠 다들 건강해야 한다면서 몸무게를 조절하고 운동으로 근육을 키워야한다고 한다. 건강이라는 미명아래 쉰이 넘어서도 세상은 큰 몸과 살집을 가진 여자인 나를 괴롭힌다. 작고 날씬한 몸이 꼭 건강하란 법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큰 여자에 대한 편견은 구세대가 가진 촌스러운 생각이라 여겼는데 얼마 전 힙합 경연에서 우승한 젊은 여성 래퍼의 뮤직 비디오를 보다가 큰 여자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하는 키 큰 젊은 여성이 자신의 몸이 작고 가늘지 못한 걸 속상해하는 경쾌한 리듬에 실린 가사는 이 십 일세기에도 큰 여자들은 자신의 큰 키를, 큰 체격을 사랑받을 수 없는 결함으로 여겼다.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섞어 잘 만들어진 뮤직 비디오의 결말은 남자친구의 다정함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젊은 연인의 달달한 연애장면은 사랑스러웠지만 왜 키 큰 여자의 잃어버린 자존을 남자의 사랑으로 채워야할까? 여성을 사랑에 적극적이기 보다 사랑받는 자리에 두는 연애서사도 지겨웠다. 그놈의 사랑, 이성애 연애의 구도는 내가 스무 살 때나 지금의 스무 살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성의 큰 키, 큰 몸을 흠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큰 여자들은 물론 작은 여자까지 자신의 몸을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다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잊곤 한다. 내 몸을 타인의 시선에 맞추다 보면 내 삶 역시 타인의 시선 아래 두게 된다.
최근에 나는 엄마에게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서 왜 그랬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는 자신이 늘 크다는 말을 들어서 그게 너무 싫어서, 나도 자신처럼 커질까봐 그랬다고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그 세대 여성보다 큰 키를 가졌다. 이젠 표준 체중이 훌쩍 넘는 나에게 늙어 작아진 엄마는 늙으면 먹고 싶어도 입맛이 없어 못 먹는다고 맛난 것을 많이 먹으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도 엄마의 훈육이 잘 따랐던 나는 과체중에도 맛난 것을 좋아한다. 키든 몸이든 크면 좀 어떤가. 가부장제 이전의 신들은 모두 거구의 여신들이었는데 말이다. 여신까지 갈 것 없이 ‘풍채 좋은’ 나는 더 이상 내 큰 몸이 부끄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