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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고 나가는 일

청계천에도 명동역에도 불 탄 공장 지붕 위에도

by 조용한 언니

직업란에 프리랜서라고 쓰거나 매체에 글을 쓸 때 예술노동자라고 한다. 프리랜서라고 하나 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정말로 ‘프리’할 때가 많다. 매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예술가라고 하면 민망해서 낯 뜨겁고 오글거린다. 세상에 공표한 직업으로 기본생계도 잘 꾸리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청탁을 받고 혹은 계약금을 받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 않더라도 예술가는 늘 작업을 해야 하는데 통장에 입금이 되지 않는 한 그러기란 쉽지 않다. 자주 나의 쓸모를 의심한다. 한편 나는 그저 돈으로 움직이는, 예술도 돈이 돼야 하는 인간인가 생각한다. 원하는 것은 예술인가, 돈인가. 이 질문은 다시 나를 하찮게 하고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그날은 아침 내내 비가 내렸다. 늦잠을 자고 망설이다가 시내로 나갔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작은책》이 오랜만에 노동절 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왜인지 꼭 나가야 할 거 같았다. 그건 깃발 아래 서지 않더라도 갈 곳이 있어서였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삼삼오오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집회에 가니 다들 집회에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노조 조끼를 입은 이들도 보였다. 함성소리가 들리고 오랜 만에 듣는 투쟁가가 서울 한복판에 울렸다. 고백하자면 난 집회가 힘들다. 최루탄이 터지던 학생시절의 집회와 시위는 쫄보인 나에게 공포이기도 했다. 요즘의 집회는 축제 같을 때가 많지만 스피커로 울리는 큰소리와 많은 사람들 속에 정신이 없고 어지러웠다. 큰 소리로 말하는 것도 괴로웠다. 그런데 이 날은 반가운 얼굴을 봐서 그런지 갈 곳이 있어서인지 큰소리도 정다웠다. 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가. 소속감과 연결감은 사람을 얼마나 든든하게 하는가. 오랜만에 노조에서 일하는 친구도 만났다. 등짝에 작은 노조 깃발을 옷핀으로 고정하고 얼굴은 더 까맣게 타있었다. 자유로운 히피 같던 친구는 노조 상근 활동가가 되었다. 그건 그것대로 어울려 보였다. 친구 덕분에 《작은책》부스 말고도 여기저기 다른 부스도 기웃거렸다. 그러다 집회 대열에 함께 서게 되었다. 대열이 움직이자 얼결에 소속 없는 노동자인 나도 행진을 했다. 걷다가 오래 전 알던 이들을 발견하고 그리 친하지 않았는데 가서 아는 체도 했다. 행렬 속에 함께 하니 저절로 넉살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분홍 조끼를 입은 학습지 노동자를 보면서 방문학습지 일을 하던 때가 떠올라 친밀함을 느끼고 보라색으로 맞춰 입은 화장품 노조원들을 보면서 괜히 반가웠다. 예술노동자들이 깃발을 들고 왔다면 그것도 반가웠을 것이다.

청계천에 다다를 때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비가 그친 흐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눕기는커녕 앉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CCTV 철탑 위에 사람이, 노동자가 있다. 지상에서 30미터 위에서 아래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하늘에 매달려서 그리고 아래에서 행진하며 함께 주먹을 쥐고 구호를 외친다. 청계천에도 명동역에도 불 탄 공장 지붕 위에도 노동자가 있다. 신문과 컴퓨터 화면 속 글자가 아니 바로 앞에서 손 흔드는 모습을 보니 눈이 따가웠다. 창피하고 미안해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멀지만 웃는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래의 사람들도 다들 환하게 웃었다. 행진하는 무리들이 일제히 고개를 드는 것도 손을 흔드는 것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오래 오래 서울 중심가를 돌고 돌아서 행진대열은 광화문으로 왔다. 그동안 하늘은 더 낮게 가라앉아 북악산이 절반쯤 가려 있었다. 그 흐린 하늘 아래 늙고 젊은 노동자들이 뚜벅 뚜벅 걸어와 행진을 마감했다. 오늘의 행진은 끝나지만 아마 싸움은 오래도록 계속 될 것이다. 나 역시 예술과 노동에 대한 고민을 계속할 테지만 그렇다고 작업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더러 하찮고 자존감은 바닥을 쳐도 쓸모를 의심하는 예술노동자는 꼭 필요하다는 믿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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