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쩍 끼고 싶은
시끄럽고 어수선한 봄이다. 봄눈이 내리다가 돌풍이 불고 남쪽에선 산불이 길고 오래 갔다. 온 산이 활활 타들어 가는데 뒷북으로 오는 산불조심 재난문자에 한숨이 났다. 봄꽃이 피는 대신 검은 재만 남은 남쪽의 산과 들은 참담했다. 매일 일터로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소속이 있는 것도 아닌 나는 세상의 흐름을, 사회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올해 봄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동안 찾아보지 않던 시사뉴스를 꼬박꼬박 챙겨봤다. 뉴스 속 아사리 판 같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현기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꽤 길게, 만 오년이 넘게 하고 있는 드로잉 모임이 있다. 그림을 배우는 핑계가 있긴 하지만 오래 보다 보니 이젠 가까운 사이가 된 이들이다. 나를 제외하곤 다들 직장인이라 토요일에 모였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다 헤어졌는데 올 봄에는 모임이 끝나면 서둘러 헤어졌다. 각기 속한 단체와 노조에서 집회를 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분들을 배웅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함께 하기도 했다. 쉬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그림을 배우고 집회에 매번 참석하는 이분들은 부지런하고 뜨겁고 열렬하다. 무슨 일이든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고 게으른데다 냉소만 날리는 나는 이 분들이 신기하고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슈의 영향 속에 있다는 걸 잘 안다. 심드렁한 척해도 뉴스를 찾아보고 집회대열 끝자락에 어색하게 서있을 때도 있다. 드물지만 사람들과 말이라도 섞게 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선명한 분노를 함께 나누기보다 뿌옇게 답답한 감정이 올라올 때가 많다. 저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이 아닌, 나와 비슷한 지향을 지녔을 거라 짐작한 이에게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나올 때, 나의 상식과 그의 상식이 다를 때, 가까운 이들에게 나와는 다른 견해와 태도가 읽힐 때, 자주 당황스러웠다. 젠더에 대해 이야기 할 땐 그 차이가 더 커졌다.
종종 생각한다. 나의 이 당황스러움과 때로는 우울하기까지 한 감정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편협함일까. 하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조차 못하는 건 외롭고 더 우울한 일이다. 인사동에 지하철이 서지 않는 며칠이 지나자 혼란스런 봄은 일단락되는 것 같았다. 다행스러웠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가벼워진 날, 겨울옷과 봄옷이 뒤섞여 걸린 옷걸이에서 잡히는 대로 윗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산책로엔 사람들이 삼삼오오 걷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새순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는 그래도 봄날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푸른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던 땅엔 들풀이 자라고 노란 꽃이 피어있었다. 민들레는 아닌데 민들레랑 비슷한,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 사이로 작은 돌탑이 있었다. 깊은 산 속도 아니고 기도하는 절터도 아닌 곳에 있는 돌탑은 생경스러웠다. 장난삼아 쌓은 것인지 어떤 바람을 담은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쪼그리고 앉아 나도 작은 돌멩이를 찾아 위에 올렸다. 혼자 나온 산책길에 심심해서이기도 하고 누군가‘들’이 쌓은 그 마음에 나도 돌멩이 하나 얹으며 어물쩍 끼고 싶기도 했다. 내가 늘 멀찍이 서서 그래도 대열 끝에 서있는 이유도 돌멩이를 하나 얹는 마음과 비슷했다. 특별한 바람이나 기도가 있어서는 아니다. 지금 같은 시공간 속에 함께 하는 사람들 속에 나도 있고 싶은 마음. 누군가는 이걸 연대라고 부르거나 공동체라는 무게 있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나에겐 다르더라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기대 같은 것이다. 그러니 나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입장의 차이가 있더라도 당황스럽거나 우울할 일은 아니지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내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봄이니 희망적으로 가벼워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