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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밖으로 나갈 시간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by 조용한 언니

작년과 올해 사이, 세상은 뒤숭숭한데 나는 집 밖에 나간 지 오래 되었다. 예술 작업을 위한 칩거도, 존재의 성찰을 위한 침잠도 아닌 무기력한 게으름이었다. 자주 나가던 동네 산책도 하지 않았고 연락이 오는 곳도 없었다. 책도 거의 읽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던데 말도 많고 생각도 많던 나는 귀가 어두운 아버지처럼 말수가 적어졌다. 정확히는 대화의 즐거움을 나눌 관계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별 생각도, 아무 생각도 없이 살다보니 글쓰기가 재미없어졌다. 나에겐 우울보단 분노가 더 힘이 세고 그 분노를 분출하는, 혹은 다스리는 글쓰기는 늘 재밌는 놀이 같았다. 그런데 잘 살지 못하면서 글만 그럴듯하게 쓰는 게 거짓 같아서, 사는 건 대책 없이 엉망인데 그런 나를 보여주지 않는 글쓰기가 위선 같아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물속에 가라앉은 채 시간이 흘렀다. 물 밖 세상은 시끄럽고 다들 뜨거운데 나는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써야 할 글이 생겼다.

마감일이 정해진 계약서에 서명을 하니 병아리 눈물만큼 계약금을 주었다. 이래도 저래도 글을 써야 했다. 갑과 을로 명시하는 계약서의 을이 되는 것도 오랜 만이었다. 을의 노동이 된 글쓰기는 우울하다고, 재미없다고 못하면 안 되는 일이니 글을 썼다. 세상에 분노하는 글쓰기, 나를 돌아보는 글쓰기가 아닌 어쩌다 밥벌이가 된 글쓰기 노동은 별자리에 대한 글이었다. 사람들이 점술로 아는 그 별자리 말이다. 몇 년 전 강좌에서 만난 별자리 선생님은 강좌가 끝난 후에도 종종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자신이 하는 강좌에 나를 끼워주곤 했는데 함께 별자리 책을 쓰자고 제안했다. 활기 찬 그는 늘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으로 명상과 요가를 하고 매일 달리기를 한다. 별자리 공부와 달리기가 전혀 이물감 없이 어울리는 선생님을 만나러 나가는 것이 두문불출 와중에 유일한 외출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찌어찌 별자리 원고의 초고를 겨우 마감했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고 책을 들추면서 글쓰기에 대한 약간의 재미가 다시 살아났고 고쳐야 할 게 잔뜩 있는 초고라도 마무리하니 아주 작은 성취감이 생겼다. 별자리 선생님처럼 달리기라도 한다면 더 좋겠지만, 무기력을 깨우는 건 나에게 밥벌이 노동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별자리 책을 쓰고 있지만 나는 별자리로 내 미래를 점치지도 않고 사실 내 미래가 그리 궁금하지도 않다. 미래는 오늘 사는 모양을 닮을 테니 미래가 궁금한 사람은 그냥 오늘을 잘 살며 되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을 잘 사는 게 무엇인지 자주 길을 잃어 별자리 공부를 했다. 작은 곰 자리에 있는 북극성이 종종 길 잃은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고 나침반이 되듯 별자리에 대한 글쓰기는 나에게 작은 환기가 되었다. 인어공주도 아니고 별주부도 아닌데 언제 물 밖으로 나갈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글쓰기로 부력을 얻었는지 물방울처럼 가볍고 싶었다. 글쓰기가 왕자가 되고 토끼의 간이 된 것일까. 마침 두 달을 쉰 작은책 원고를 쓰는데 멀리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글을 쓰면 잘 살아야 하는데 내가 그렇지 못하다고 하니 친구는 누가 글을 쓰면 잘 살아야 하냐고 하면서 전화기 너머에서 깔깔 웃었다. 하긴 잘사는 사람만 글을 쓰면 글 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고, 사는 대로 생각하다가 더러 얻어걸리면 글도 쓰고 그러는 거지 싶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친구의 웃는 소리가 물방울 같았다.

별자리 선생님을 만나고 멀리 사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결국 관계에서 얻는 에너지가 제일 큰 동력이란 걸 다시 확인했다. 긴 무기력은 다 외롭고 심심해서 그런 거였나 싶었다. 아직 한겨울 같은 날씨지만 그래도 봄이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고 밖으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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