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늙어간다는 것
간혹 금실 좋은 노부부를 길거리에서 본다. 정말 아주 드물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가 파과라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노인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며 현실적이지만 품위가 있어서다. 잘못된 인식 속 노인의 모습은 늙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주지만 파과 속 노인의 묘사는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본 아름다운 노부부의 모습을 구병모작가처럼 묘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노인들이 아닌 두 사람, 농익은 사랑에 더 단단해진 걸음걸이를 지닌 그런 아름다움.
코로나가 성행하기 전 친구와 다낭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 머물던 리조트의 해변가에서 백발의 부부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한 손으로 두 사람의 신발을 들고 한 손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파라솔 아래로 걸어가 앉았다. 할머니의 발을 털어주었다.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담고 싶었지 만 사진에 담아서는 안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따스함마저 담을 수 없을 것이란 확신에.
난 할머니 한 분만을 보고 자라왔다. 외할머니는 엄마의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돌아가 셨다.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고등학생 시절 돌아가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은 한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사 랑스럽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을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만 보아도 고함치는 할머니, 맞서 싸우는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라.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부모님만 보아도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은 상상이 안되니까.
나의 나이 듦의 끝에는 어떤 모습이 자리하고 있을까? 언성을 높여가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관계 혹은 함께 느릿한 걸음을 나누며 손을 잡은 채 사랑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관계.
길가에 보이는 노부부의 모습에 잠시 따뜻했던 기억.
함께 늙어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라는 형태를 떠올리다, 약국에서 일할 때 항상 함께 오시던 할머니들이 떠올랐다. 자매셨다. 작고 연약한 체격의 두 분은 한 분의 주동하에 어려운 발걸음을 하며 약을 받으러 오셨다. 두 분 중 더 정정한 분이 동생이셨다. 또 떠오르는 분들은 부부셨다. 입술을 읽으시며 소통하시는 여성분과 그분의 남편, 처음 마주했을 때 어떻게 그분들의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톡 하시며 웃으시던 부인분의 얼굴이 생각난다. 곱디곱던 웃음.
함께 늙어 간다는 건, 그런 거겠지, 손을 잡고 얼음 판을 조심스레 걷고.
아프지 말자 다짐하며 병원을 오가고, 약국에서 약을 탄 뒤 약국 자판기에 있는 커피 한잔을 뽑아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는 것. 물론 앞의 언급처럼 언성을 높여가는 전투적인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누군가와 함께 늙어갈까.
어쩌면 이렇게 가족들의 울타리에서 가족들을 위해 늙어가더라도 그 또한 함께니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