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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Jul 29. 2022

퇴근하고 미술학원에 갑니다.

퇴근 후 시작되는 설렘과 낭만(浪漫)

인사팀 주임이 회사 메신저로 상담을 하자며 나를 불렀다. 

“혹시 퇴사 이유가..?”


“아, 저 뉴욕 가요.” 

나는 미소 지으며 답했다.


내 비밀 퇴사 작전이 시작된 이후로 나는 항상 퇴사 통보 당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세세하게 그리곤 했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디자인 스쿨이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영화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의 주인공 앤디가 된 것 마냥 유치하고 쓸데없는 상상을 자주 했다. 이 상상들은 내게 설렘이자 낭만(浪漫)이었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회사생활과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는 출근길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첫 레슨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면서부터 속으로 간절히 퇴근을 외쳤던 나였음에도 그날은 달랐다. 여느 때처럼 회사일을 마치고 곧장 약수역 작업실로 향했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오던 그 설렘과 낭만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작업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몇 명의 학생들이 열심히 작업 중이었다. 아크릴 물감의 기름진 냄새와 곳곳에 널려 있는 페인팅과 이젤까지 모두 나에게 신선한 풍경이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보는 무기력한 사람들의 표정과 무거운 사무실 공기에 익숙한 나는 이곳이 주는 신선함과 일종의 안락함이 좋았고 한없이 ‘나' 다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음악 듣고 표현하는 작업 잘하던데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작업 시작해 볼게요.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되, 이번 작업방식은 저번에 사용했던 오일파스텔로도 해보고 콜라주도 추가해볼게요. 콜라주 좋아한다고 했었죠?” 선생님이 물었다.


얼마 전 동네 미술학원을 기웃거리며 나름 미술이라는 분야에 발을 디딜 무렵 나는 심심할 때 잡지의 일부를 오려서 그 조각들로 하나의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 콜라주 작업을 집에서 혼자 해보곤 했다. 회사 창고에는 보그나 엘르와 같은 패션 매거진이 쌓여있었고, 새로운 이슈들이 입고되면 지난 이슈들은 버려졌다. 나는 버려질 잡지 몇 개를 가져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잡지 페이지를 오리고 붙이며 콜라주 작업을 했다. 잡지, 스케치북, 가위 그리고 풀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3시간의 레슨 동안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탐구와 이를 어떻게 작업 속으로 녹여낼지에 대한 이야기를 선생님과 나누었고, 오일파스텔과 콜라주로 러프한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다. 3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몰입한 경험도 꽤 오랜만이었다. 늦은 밤이 돼서야 작업실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까만 밤하늘을 보며 한남대교를 건넜다. 몸은 이미 녹초였지만 정신은 아주 맑았다. 집에 도착해 씻고 누웠다.


정말 오랜만에 내일이 오는 게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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