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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Aug 04. 2022

위인전만 주구장창 읽던 소녀의 미래

소박한 꽃화분

  어린 시절 나는 책을 참 좋아하지 않는 아이였다. 엄마가 전집 동화책을 집에 들이면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오빠는 전권을 다 읽었다. 책은 깨끗한 새책인데 오빠는 이미 새 책에 흥미가 떨어져 버리니 엄마는 전집 도서 환불을 요청해야 하나 고민하는 날도 있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책을 많이 읽던 오빠와 다르게, 한집에서 같은 환경에 자란 나는 책을 잘 읽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내가 즐겨보던 책이 있었다. 바로 위인전이었다.


  역사 속 위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며 뛰었다. 나도 퀴리 부인처럼 노벨상을 받고 싶었고, 에디슨처럼 세상을 밝혀줄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고 싶었다. 위인전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나도 그들처럼 위대한 인물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날이 많았다.


  나는 위인들이 세상을 이롭게 했던 활동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이 세계적인 거물이 된 타이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남들 앞에서 돋보일 수 있는 화려한 모습이 그저 부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에 항상 시험 결과에 예민했다.


  눈에 보이는 등수에 집착하는 나한테 어느  엄마와 학원 선생님이 말도  되는 제안을 했다. 나보고 피아노 전공을 해보는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나는 피아노 치는 시간이 좋았다. 까만 콩나물 같은 음표가 잔뜩 심어진 악보를 들여다보 더듬더듬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익숙해져서 빠른 속도로 리듬에 맞춰 연주할 때면 쾌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름다운 선율을 느끼는  시간이 좋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내가 봐도 스스로가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있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할 바에야  길을 걸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피아노 뚜껑을 덮어버리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시 열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할 바에야 피아노 전공을 하지 않겠다던 그 소녀는 과연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소녀는 그냥 평범한 주부가 되어 매일 길가의 꽃을 쳐다보며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항상 학업 등수와 결과에 집착하던 성격 때문에 학교 다닐  성적이 우수했고, 입시 결과도 좋았다. 학교 이름만 대면 남들이 부러워했던 대학도 다녀봤다. 하지만 40 넘는 인생  가장 우울했던 시기를 꼽아본다면 바로 대학시절이다. 그렇게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지만 천재 같은 동기들에 비해 나는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내가 우물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나는  깊고 어두운 우물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만 했다. 한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기도 했다.


  얼마 전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화에서 자살한 의대생이 죽기 전 다이어리에 이런 말을 적어놨었다.


  “제일 잘 하는게 공부였어. 지금은 공부가 뭔지도 몰라. 토할 때까지 외우는게 공부인가? 나는 제일 잘하는 걸 제일 못하는 사람이다. 짧게 말해.. 루저”


  인생의 목표가 1등이었고, 더 이상 내가 1등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내가 루저가 된 기분이었다. 공부 하나는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들어간 순간 내가 제일 공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 나 자신이 형편없어 보였다. 내가 과연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다 내려놓고 싶었다.


  우울의 나락 속으로 계속 빠져들어가던 중 나를 정신 차리게 하는 대형 사건이 벌어졌다. 엄마가 대장암 선고를 받게 됐다. 수술을 받고 여러 달 동안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 속에서도 엄마는 식구들을 위해 힘든 암투병 생활을 이겨내려고 애쓰셨다. 당장 오늘 하루를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앞에서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소중한 삶을 내팽개치려 하고 있었다니 부끄럽고 죄송했다.


  갑자기 어린 시절 내 옆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피아노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초등학생 곁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모습이…. 어린아이들에게 피아노 치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님의 삶이 과연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일까?


  나는 지금도 티브이를 보다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면 피아노를 배우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이 곡은 모차르트 협주곡인데, 이건 쇼팽 연습곡이네….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선율을 느끼다 보면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클래식 음악이 내 일상에 녹아들어 내 마음을 더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아마도 나의 피아노 선생님 덕분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처음 펼쳐보는 시커먼 악보를 읽어내고, 악보에 그려진 음표들을 음악으로 연주해내던 짜릿한 경험. 내가 공들인 노력과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소중한 경험을 했던 순간들이 피아노 레슨 시간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익히는 동안  안에 쌓인 경험이 귀한 나의 자산이 되었다. 비록 내가  순간에 깨닫지 못했을 , 피아노 선생님은 나에게 소중한 보물을 안겨준 분이셨다.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분을 앞에 두고 동네 학원 선생님이라고 과소평가했던 어린 날의 내가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른다.


  식구들과 여름휴가를 떠나 찾아온 숙소에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숙소 입구에 나란히 놓인 작은 꽃화분이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고급스럽지도 않지만 아기자기한 꽃화분이 꽤나 사랑스러워 보여서 한참을 쳐다봤다. 호텔 로비에 놓인 고급스러운 꽃도 아니고, 광활한 들판에 펼쳐진 멋진 꽃밭 명소도 아니었다. 투박한 화분에 담긴 이름 모를 꽃이지만 소박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지 깔끔하게 한줄로 정돈된 싱싱한 화분들이었다. 앞으로 걸어갈  인생길에는 수수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잔잔한 꽃화분을 들여놓고 싶다. 남들 눈에는 화려해 보이지 않아도 애정을 갖고 매일 바라볼  있는 작은 꽃화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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