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가지 않았다면 꼴등을 면했을까?
- 한국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옥이 시작 되는 날.
한국과 일본의 새학기가 한달 정도 차이가 있으므로 큰 아이는 신학기에 맞춰 한국에 먼저 보냈다.
아이는 한국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편이었으며 그 당시 1997년도 초등학교는 개인도시락 지참, 개인 학용품 준비로 매일 전쟁이었다. 학교 앞 문구점은 학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구입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아이들은 느리고 순진하고 양보심이 많은 편이다. 7년 가까이 그런 환경 속에 있는 아이의 한국생활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학교 볼일 차 담임을 만나고 아이의 준비물 준비로 문방구에 갔었다. "문구점 사장 부부가 말했다. 이 아이 너무 착하다고 모든 아이들에게 다 양보했단다." 어떤 경우는 아이 손에 있는 것 까지도 빼앗아 가서 아이는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다." 그 아이는 일본에서 온 이후로는 한번도 자기는 일본에서 살다가 왔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통아이라면 일본물건(일제)를 들고가서 입에 침이 튀어 나오도록 자랑질을 할 텐데 아이는 그런 말이나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한번도 집에는 흔한 장난감, 가면 라이더, 후레이쉬 맨, 게임기, 팬시제품 하나 들고 다니지 않았다.
우리 시댁은 초등학교 교사 많은 편이다. 윗 동서, 시아버님, 삼촌, 사촌 동서2명, 사촌 아가씨 교장선생님, 교수 등. 학자 집안이다. 그 당시 관례는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 비해 부족하다 싶으면 교사에게 인사를 하는 제도가 엄마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부족한 아이를 위해 달 봉투를 드렸다. 돈에는 크게 구애 받지 않을 만큼 내 벌이는 괜찮았다. 일본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색채를 공부하고 들어와서 인지도도 넓혀가고 있었다.
우리가족들의 장점은 딱 하나이다. 우리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말을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 세상에 못 난 사람은 없다. 다 잘났단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편이다.
솔직히 달 봉투로 인해 아이의 학교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았든 것 같다.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는데 너무 어렵다고 말을 한다. 난 한국어 실력은 크게 좋지는 않지만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을 조금 가르쳐 본 적이 있다.
-교사의 인권을 모독한 모자라는 병신같은 두 녀석
아이의 학교 지옥생활은 5학년부터 시작이었다. 5세~10세까지의 한국에 대한 추억은 전혀 없다.
남자 교사는 이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녀석은 미국에서 한 녀석은 일본에서 두 녀석은 체육시간 둘 이서 웃고 있었다고 한다. 둘은 미국, 일본은 덤블린을 많이 해보았다. 유치원에서부터 덤블린을 해 보았다. 남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고 한다. "웃고 있는 모자라는 병신같은 두 놈 ,이리 와봐" 라고, 멀정하게 키도 잘 생긴 두 놈은 담임에게 귀싸대기를 맞았다. 한 녀석은 고막이 터지고 한 녀석은 얼굴이 빨개지고 그리고 미국에서 온 아이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상사 주재는 못하고 부모는 세탁부일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단다. 우리는 몰랐다. 아이가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담임의 호출을 받았다. 아이에게 문제가 많단다. 4학년 사생대회에서 상을 여러개 받은 아이의 그림에는 문제가 있단다. 아이는 관찰도 잘 못하고 교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한다. 미술시간 정물화를 그렸다고 하며 다른 아이들은 칠판에 그린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데 과일을 반밖에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 교사에게 건방지게 반항을 하고 종이도 다 찢어버렸다" 고. 도저히 교사로서 참을 수 없어 학부모를 불렀다. 교사의 자초지종이다.
구석에 쳐 박혀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이는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은 또 다시 시뻘개져 있었다. 나도 부모로서 아이의 학교교생활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아이 교육 잘 시키겠다고 하고 나온 기억이 있다. 그 다음에는 아이에 대해 나 역시 각별히 신경을 쓴 것 같다. 다름이 아니라 다시 봉투 봉투 열렸네가 시작 되었다. 4학년 때는 달 봉투를 하고 5학년 중요한 시기에 달 봉투를 안 하면 나는 바지 저고리냐 하는 그런 뉘앙스를 준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남편은 삼성을 나와야 할 처지였다. 삼성은 7,4제(7시에 출근하고 4시에 퇴근)을 하며 그룹 안에서는 조용히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로 조용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편은 나이에 비해 승진이 빨랐고 부서의 책입자였다. 사내 구조조정 소문이 돌며 부서 직원들의 상담요청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사정을 들어보니 자기만 그만두면 세 사람이 살 수 있더란다. 그래서 본인이 사표를 쓰고 퇴사를 결정했다. 고 한다.
남편은 일본에서 받은 연봉도 있고 아내의 수입도 나쁘지 않아 다시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은 버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직원들의 사정은 노부모를 모시고 산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자녀들 두었다. 아내가 암이다. 자기 혼자 외벌이로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한다. 등.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그만 두는 게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그 당시 6개월 지나고 회사에 전화를 해서 알게 되었다. 그 때도 크게 걱정은 하지는 않았다. 남편은 임원이 될 것이라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삼성을 나오고 조용한 퇴사 6개월 후 남편은 암 진단을 받고 만다. 그 날 난 남편과 서글픈 외출을 했다. 두 일본 생활에서 한국에 돌아 온 이후 함께 외출을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난 바빴다. 남편도 자신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는지 검사도 함께 가고 결과도 함께 갔다. 조직세포 검사결과를 보러 간 날은 하늘에는 비가 내렸다. 결과는갑상선 암이었다. 남자가 갑상선 암에 걸리는 확률은 거의 없다. 한국에 들어 온 이후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고속승진과 함께 회사가 주는 압박이 너무 크고 일본상사 주재를 하고 들어오니 7년 세월동안 한국도 많이 변했다고 한다. 암이라는 결과를 받고 비는 추적 추적 내리는데 우산을 쓰지 않고 남편은 독백하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 난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주말도 반납하고 가족보다는 회사를 먼저 생각하면서 일했다. "그런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안겨 주는 거지." 그 날 이후로 남편에게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남편은 이런 넉두리와 중얼거리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았다.
남편도 회사에서 인정 받는 인재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회사 변화를 따라 가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사표를 던졌는지 모르겠다고 직원들의 사정도 그만 두는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엄연하게 따져 보면 남편은 정말로 힘이 들었다. 본인은 자신을 무능하다고 느낀 것이다. 남편의 유능함은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이다. 바로 모든 것을 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너무 열심히 살아왔고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하물며 이 아이도 오죽 했을까?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쪽발이 소리를 듣고 5학년 담임에게는 바보 머저리라고 놀림을 받으며 말은 안해도 몇 몇 아이들 사이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 한국 말도 잘 못하는 아이라는 소리를 은근히 들었던 것이다.
아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자기가 한국에서 바보라는 사실일 것이다. 정말 이 아이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일본에 살 때 친척이나 남편 지인들이 놀러 오면 어른들에게도 자기 생일이니 자기를 위해서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 아이였다. 이런 아이 입장에서는 분명 일본에서는 똑똑한 김군이었는데, 운동신경 발달로, 달기는 일등, 그림그리기 일등, 기계체조, 수학암산 전국 동상, 만들기 일등. 이 만하면 너무 잘하는 편인데.
한국 초등학교는 매일 삼킬 것 같이 덤벼 들고 교실에 가도 눈치를 보게 되고 교사는 꼬투리만 잡아서 혼 낼 생각만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혼내기부터 하며, 큰 소리까지 질렀다고 한다.
한국초등학교 생활은 정이 안 들어도 너무 안 든다. 한국이 내 조국이요 내 고향인데 난 한국사람이 아닌가봐요? 내 국적은 어디인가요? 내 동생은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미국이라면 미국 국적이지만 난 한국에서 태어나서 일본에 잠시 다녀왔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