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기영 Mar 11. 2024

35. 오리솜털

일상에서 떠올린 단상

요즘 나는 새로 산 벽돌색 오리털 점퍼를 즐겨 입는다.


어느 날. 우연히 바라본 어깨 부위에 하얗고 조그마하고 여린 오리솜털이 옷감의 바느질 부분을 비집고 나와있다. 지나는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그것을 바라본 순간, 단단한 땅을 뚫어내고 드디어 고개를 내민 들풀의 새싹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오리솜털을 조심히 빼내어 발 앞에 던지니, 공기의 흐름을 따라 2미터 정도를 나풀거리며 날다가 힘없이 도심 건물의 구석으로 사라졌다.


갑작스레 내가 입고 있는 점퍼에 자신의 털을 빼앗기게 된 오리는 어떤 오리일까 궁금해진다. 


그 오리는 단단한 알을 어렵게 깨어내고 세상에 나와, 어미의 보호아래 새끼의 시절을 살아내고, 모이 먹고 동류들과 물 위를 떠다니며 일상을 보내다, 편안히 잠드는 그의 삶을 평범하게 살아내었을 것이다. 생각지 못한 날. 갑자기 타의에 의해 그의 삶을 마치고 자신의 몸과 하얀 털을 다 내어주었을 거다. 그 털이 흘러 흘러 내 옷 속에 숨 막히게 갇혀 있다, 드디어 틈을 비집고 나와 그렇게 건물의 담장 밑 구석으로 사라져 갔다.


그간. 나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삶이 불안했다. 세간에 넘쳐나는 '성공신화'들을 보고 들으며, 나도 그 주인공이고 싶은 숨겨진 욕망이 넘실댔다.


요즘은 평범한 삶에 대한 감사함을 부쩍 느끼고 있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하루를 쌓아내어 보잘것없지만 '하나'의 인생을 만드는 것도 수많은 삶들 중 하나의 오롯한 삶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삶이, 본의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죽음 이후가 뭇 생명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산 오리에도 미치지 못까 봐 걱정이 되긴 한다.


사라진 오리솜털을 찾아 건물 구석 틈에 눈길을 다시 주었지만 찾을 수 없다.


다시 생각해 보니 '성공신화'를 만들지 못하고, 명성을 남기지 못한 평범한 인생들도 주변의 그 누군가에게 조그맣고 가벼운 오리솜털 같은 기억과 사랑의 편린 남길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주변의 그 누군가가 마음속 허한 틈에서 비집고 나오는 기억과 사랑의 편린을 우연히 발견해 내곤 조용히 빼내어 허공에 날리면, 한 사람의 일생의 편린들이 회한 속에 나풀거리다가 길가 구석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마치 하얀 오리솜털처럼.

작가의 이전글 샌디에이고의 추억(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