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단테, 『신곡』
월요일 아침, 지하철역 개찰구를 지나며 한숨을 삼켰다.
주말에 너무 잘 쉬었나보다. 특별히 오늘따라 출근길 인파는 마치 저승의 강을 건너려는 영혼들 같았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고, 졸린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마치 이미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문 위에 새겨진 문구다. 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출근길 직장인들에게 더 절실하게 와닿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이 작은 지옥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 『신곡』 중, 지옥문 문구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신곡(La Divina Commedia)』이라는 대서사시를 썼다. 이 작품은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겪는 모험을 그린 장대한 이야기다. 그의 안내자는 로마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 단테는 그의 인도를 받아 먼저 지옥으로 향한다.
그가 처음 도착한 곳이 바로 '지옥문' 앞이다. 그 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 문장은 지옥에 들어온 모든 영혼이 희망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구원도, 용서도, 탈출도 없는 곳이 지옥이니까. 저승사자 카론이 노를 젓는 아케론 강을 건너면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꼭 죽은 자들만의 이야기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희망을 버려야 하는' 순간들이 있지 않은가?
단테의 지옥은 9개의 원으로 나뉘어 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점점 더 깊은 원으로 내려가는데, 가장 깊은 9원은 배신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사탄이 얼음에 반쯤 묻혀 울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작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① 직장 지옥, '무한 루프의 원'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상사의 한마디. "이거 내일까지 다시 검토해봅시다."
이건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프로메테우스처럼 끝없이 고통받는 것과 같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같은 길을 걸어 같은 사무실로 들어가, 같은 얼굴들을 마주하는 일상. 이보다 더한 '무한 루프의 원'이 있을까?
단테의 지옥에서 '분노의 원'에 있는 영혼들은 스틱스 강의 진흙 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며 서로를 물어뜯는다. 마치 회사에서 권력과 인정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직장인들처럼.
"저 프로젝트 결국 망했대. 처음부터 말했잖아, 안 될 거라고."
"아, 그래? 근데 그 프로젝트 담당자 누구였지?"
"김 과장이야. 이번에 인사고과 망했겠네."
이런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은 단테의 '분노의 원'과 무엇이 다른가?
② 연애 지옥, '망각의 강'
헤어진 연인과 다시 연락하려는 순간의 망설임. "그래, 한번만 더..."
하지만 과거의 실수를 잊는 순간, 다시 같은 패턴으로 빠져든다. 이건 단테가 묘사한 '망각의 강(Lethe)'을 마신 영혼들과 다를 바 없다.
"이번에는 달라질 거야."
"우리 다시 한 번만 더 시작해볼까?"
"전에는 내가 미숙했어."
이런 말들이 오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망각의 강'을 마신 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잊고,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연애의 악순환.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바위를 끝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린다. 하지만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 그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단테의 지옥에서 '색욕의 원'에 있는 영혼들은 끊임없이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돌아다닌다. 마치 연인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모습처럼.
③ 시험 지옥, '운명의 심판'
시험지를 펼치는 순간의 절망. "아, 이거 본 적 있는데..."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자신의 죄를 심판받는 영혼들같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 승진 시험을 앞둔 직장인... 그들의 눈빛에는 지옥의 불꽃이 타오른다. 시험장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보이는 것만 같다.
단테의 지옥에서 '사기꾼의 원'에 있는 영혼들은 끓는 역청 속에 잠겨 있다. 시험에서 컨닝을 하다 들킨 학생의 심정이 그러하지 않을까?
④ 소비 지옥, '탐욕의 원'
"이번 달엔 정말 돈을 아껴야지." 하지만 온라인 쇼핑몰에서 울리는 알림. "단 하루! 특별 세일!"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탐욕의 원'에 있는 영혼들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의 유혹에 시달린다.
통장은 마이너스인데, 손은 카드를 향해 뻗어간다. 집에는 이미 비슷한 옷이 수십 벌 있는데, 또 새 옷을 사러 간다. 이런 소비 지옥은 단테가 묘사한 '탐욕의 원'과 무엇이 다른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 달부터 정말 돈 모을 거야."
"이건 정말 필요해서 사는 거야."
"세일 때 사는 게 오히려 더 절약하는 거잖아."
이런 자기 합리화는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다.
직장에서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동료에게 작게 속삭인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모두가 웃으면서도 씁쓸하게 공감한다. 당신은 이미 '교양 있는 직장인'이 되었다.
또는 상사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우리도 희망을 버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라고 말하며 우아하게 거절할 수도 있다. 단테의 문장을 인용하면 직설적인 거절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SNS에서
일몰 사진과 함께 한 줄 문구를 올린다. "오늘도 퇴근. 단테의 말이 떠오른다. '여기 나가는 자, 모든 희망을 되찾아라.' #단테의_반전 #퇴근길_행복"
당신은 지식인이면서도 위트 있는 사람이 된다. 지인들은 댓글로 "오, 단테?"라고 물을 것이고, 당신은 간단히 『신곡』에 대해 설명하며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친구와 농담할 때
지나치게 비싼 레스토랑 메뉴판을 보면서 친구에게 말한다. "이 메뉴판에도 써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재산을 버려라.'"
또는 시험 기간에 친구가 "공부 잘 돼?"라고 물으면, "응, 근데 교재를 펼치는 순간 단테의 지옥문이 떠오르더라." 라고 답한다. 당신은 유머 감각과 지식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
데이트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의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단테의 『신곡』을 언급한다. "저는 가끔은 출근길이 단테의 지옥 여행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구가 사무실 입구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당신은 지적인 매력을 풍기는 사람이 된다. 상대방이 단테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대화가 더 깊어질 것이고,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새로운 지식을 나누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단테의 『신곡』은 우리를 겁주기 위한 지옥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겪는 성장과 정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단테는 지옥을 지나 연옥으로, 그리고 마침내 천국에 이른다. 그의 글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모든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 단테가 지옥의 고통스러운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우리의 일상적 고통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둘째, 어둠 속에서도 빛은 존재한다.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어둠 속의 안내자였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다. 친구, 멘토, 가족... 그들은 우리의 베르길리우스가 될 수 있다.
셋째, 모든 여정에는 끝이 있다. 단테의 지옥 여행이 결국 천국으로 이어지듯, 우리의 고통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옛말처럼, 우리의 작은 지옥들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다.
단테의 지옥문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쓰여 있지만, 단테 자신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지상으로, 그리고 천국으로 올라갔다. 그의 여정 자체가 역설적으로 '희망'의 이야기다.
진정한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무리 어둡더라도 완전한 지옥은 아니다. 여전히 희망의 빛은 존재한다.
그러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도, 시험지를 펼치는 순간에도,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는 밤에도, 작은 희망 하나쯤은 품고 가자.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살아있는 한 여정은 계속된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문구를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가 아직 희망을 품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들어왔으니, 희망이라도 챙겨가자. 그것이 단테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메시지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