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성찰의 끝에는

by 윈스턴

지난 3년 간 나의 하루 일과는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달라졌다.

책이나 영상을 접하면서, 그리고 여러 가지 경험들을 하면서 머리를 치는 듯한 강렬한 깨달음을 수차례 느낀 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생각도 많이 바뀌었고 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독서를 하고, 운동을 하고, 꾸준히 공부도 하고, 산책을 하고, 여행을 잘 안 다니게 되었다.


내가 많이 달라졌구나. 그렇게 느껴지지만 한편에서는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어떤 부분이 바뀐 걸까.

어쩌면, 가만히 나이를 먹어도 결국에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나의 지금 모습은 내가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가진 태생적인 본질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떤 책을 읽었던지, 어떤 일을 했던지, 어떤 경험을 했던지 간에, 나 스스로가 무언가 깨달았다고 번뜩이며 느낀 것들은, 결국 ‘내면 속에서 속삭이던 말을 이제야 들었다’로 귀결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영화를 보게 된다면,
나는 등장인물 A에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감화되고 슬퍼하며 교훈을 얻는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등장인물 C에 감정을 이입하고, 호쾌함을 느끼고 복수심에 공감하며 기뻐하고 교훈을 얻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나와 같이 등장인물 A에 감정을 이입하지만, A를 멍청하다 생각하며 비웃고, 조소하며 반면교사로 삼는다.




경험이란 어쩌면 그런 것들의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경험들은 나의 생각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고, 나머지 부분들이 내가 몰랐던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사용된다.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서 감정이 먼저 앞선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게 정말 공감 가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을 때, 책이 하고 싶은 주장에 대해 ‘좋다’라는 이미 감정이 있다면, 나는 설득이 된 상태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의 구절을 읽어가며 그 주장을 스스로 세뇌하며 설득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책의 주제에 ‘나쁨’이라는 감정이 내면에 있다면 쉽사리 받아들이지도 않고, 잘 읽히지도 않는다. 그리고 책의 허술함을 쉽게 간파해 낸다.

그리고 거부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지금껏 경험을 내 성질에 따라 취사선택을 해왔고 나를 설득해 온 과정 끝에, 나는 그냥 '될 예정이었던 나'가 되었다.


한적한 곳에 사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치열하게 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사색하는 것이 좋고, 비우는 것이 좋고, 유산소 운동이 좋고, 소박한 것이 좋고, 겸손한 것이 좋고, 과묵한 것이 좋다고.

그렇게 나는 경험에 대한 사색을 하면서 근거를 찾아 깨달았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제자리에서 서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내가 깨달은 소중한 것들을 가르치고 싶지만, 결국 그것들은 모두 자기 내면만 설득할 수 있었던 아무 의미 없는 메아리지 않을까. '결국에 그렇게 깨달았을 사람들'만 모여서 나의 깨달음에 경청해 주고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확신만 강해지는 일이 아닐까.

내가 어떤 경험을 했든, 늦든 빠르든, 결국에는 이런 글을 적고 있는 ‘나’가 되지 않았을까.


나를 싫어하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엔 설득이 되지 않는 사람과 설득하지 않아도 결국 그렇게 될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니까.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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