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런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정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언컨데, 뮤지컬 <마틸다>를 꼽는다. 그 정도로 인상깊었고, 기대 이상이었다.
뮤지컬 <마틸다>는 전세계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나오는 뮤지컬이긴 하지만, 아이를 방치하다 못해 폭언, 학대하는 부모와 그보다 더 무지막지한 악당 교장선생님의 상상초월 폭력과 무시무시한 범죄가 담겨있는 내용이라 만 6세 이상 관람가였다. 때문에 한국나이로도 겨우 5세인 민찬이는 <마틸다>를 보지 못하는 나이였다. 아쉽지만, 남편은 공연은 나에게 양보하고, 민찬이를 돌봐주기로 했다.
민찬이와 아빠가 함께하지 못하는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마틸다> 뮤지컬 관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다인이의 <마틸다>에 대한 애정 덕분이었다. 영어 학원에서 '로알드 달'의 소설 <Magic Finger>를 재밌게 읽은 다인이에게 같은 작가가 쓴 비슷한 종류의 여학생이 등장하는 사이다(?!) 소설, <마틸다>를 권해주었다. 하지만 너무 길고 어려워서 아예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게 이렇게 재밌는 내용이라고 영화를 먼저 보여주었는데, 손에 땀을 쥐며 매우 흥미롭게 보더니, 자기 영어 이름까지 '마틸다'로 개명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7살, 영어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때, 영어 이름을 짓기 싫어해서 그냥 'Da-In'으로 불리다가, 10살이 되더니 자기도 영어 이름을 갖고 싶다며, 캐롤리아나, 다이아나, 로지 등... 딱 맘에 드는 이름이 없어서 이런 저런 이름으로 계속 바꾸면서 하나의 이름에 정착하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런 다인이가 영화 <마틸다>를 보고 나더니, 자기 영어 이름을 '마틸다'로 바꾸었다. 또 바꾸냐며... 이름 그렇게 자주 바꾸는 거 아니라고 타박하고, 이번엔 얼마나 가는지 봐야지 했는데, '마틸다'로 반년 넘게 유지중이고, 지금도 이 이름에 꽤 만족해 하고 있다.) 심지어 다인이는 여행을 오기 전, 자기 또래의 동생, 친구들, 그리고 언니 오빠들과 뮤지컬 공연을 하고 오지 않았던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하는 <마틸다> 뮤지컬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 궁금해했고, 나또한 한국에서부터 <마틸다>의 넘버들을 들으며 이 뮤지컬을 매우 기대하고 있었다.
<마틸다>는 데이시트가 저렴한걸로 유명하다. 검색해보니 데이시트 5파운드짜리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야를 가리는 좌석이기도 하고, 학생들을 위한 티켓인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라이온킹>은 여행가는 주 월요일에 디즈니 데이시트를 노려보기로 한 상태였고, <마틸다>는 가서 예매할까 하다가,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해두자 싶어서 8월 초에 예매를 시도했 보았다. 자리마다 가격차이가 꽤 있었는데, stall석에 남아있는 2자리가 64.5파운드에 있었다. 기왕 보는 거 앞에서 잘 보자 싶어서 그 자리를 예매 결제하려고 하는데, 해당 홈페이지에서 취소표 환불에 대한 바우처를 추가 지불을 할 건지 물어왔다.
Add Booking Protect for £9.80
By adding on refund protection, you can apply for a full refund if you or anyone in your party can’t attend the show. This will cover you in the event of adverse weather, breakdowns, illnesses and lots more. Please read the . Click the switch to add to your order.
여기서 다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갑자기 아프기라도해서 못가게 되면? 설마 코로나 걸려서 비행기조차 못타게 된다면?' 모든 변수들이 다시 머릿속에 맴돌았다. 별 생각없다가, 10파운드를 내면, 취소해도 환불해주겠다고 하니... 보험처럼 10파운드를 내고 변수에 대비할 것인가, 그냥 별일 없을거라 믿고 예매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였다. 그치만 뭔가 공돈을 날리는 느낌이라 예매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14일 이전에는 취소가 되지만, 이미 예약하려던 그날은 공연 14일도 안 남은 시점... 아예 표 자체가 75파운드였으면 별 생각 안했을 것 같다. 급 망설여졌고, 그냥 가서 모든 게 확실해졌을 때 예매하자 하고, 예매를 또다시 미루었다.
그리고 런던에 무사히 도착한 그날! 보기좋게 라이온킹 예매에 실패하고, 서둘러 <마틸다> 표를 서치하기 시작했다. 각종 공연 할인 관람표를 살 수 있는 '투데이틱스' 어플과 <마틸다> 공식 홈페이지를 비교해보고, <마틸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자리를 예매 했다. 맙소사! 가격은 82.5파운드였다. 이게 좌석이 좀 더 좋은 자리여서 더 비싼건지, 하루 전날이라 더 비싸진건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며 정리하다보니.. 그냥 한국에서 10파운드 바우처 추가 지불하고 예약하는게 훨씬 이득이었네?!^^;; 뒤늦게 후회해도 어쩔 수 없지. 그냥 더 여기가 그때 예매하려고 했던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일거라 생각하는 수밖에...! 어쨌든 앞자리 stall 좌석을 선택하길 백번잘했다. <마틸다> 역을 맡은 어린 배우의 표정과 에너지를 온전히 코앞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교훈! 꼭 볼 공연이라면, 좋은 자리에서 볼 욕심이 있다면! 미리미리 예매해두자!)
<마틸다>가 탄생한 나라! 마틸다 뮤지컬이 탄생한 극장! '캠브리지 씨어터' 앞에 도착하니 기대감이 폭발했다. 다인이는 극장 앞에서'마틸다'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불합리한, 옳지 않은 어른들에 맞서는 '마틸다'가 당당하고 위엄있게 두팔을 허리에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옆모습으로!! (이 사진을 다인이의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주었다!)
극장에 들어서자, 바닥부터 천장까지 켜켜이 빼곡히 쌓인 블록들에 알파벳들이 적혀있는 무대가 보였다. 책을 좋아하는 천재 소녀 '마틸다'에 딱 맞는 무대 컨셉이었다.
어린이 배우들의 에너지는 폭발적이었다. '마틸다' 배역을 맡은 자그마한 배우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나는 공연도 공연이지만, 옆에 앉아서 공연을 보는 다인이의 리액션도 너무 재밌었다. 박수치고, 놀라고, 소리지르고,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꽤나 깜짝 놀랄만한 무대 장치들이 많았는데, 피그테일을 끔직히 싫어하는 트런치볼 교장선생님이 여자아이의 양갈래 머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다 던져버리고, 어딘가에서 아이가 툭 떨어지는 장면에선 깜짝 놀라 어떻게 된거냐며 어리둥절해했고, 부르스가 무대 위에서 초코케이크를 어떻게 다 먹어치우는지, 칠판에 글씨는 어떻게 저절로 써지는지 등등을 신기해하고 궁금해했다. <When I grow up > 부분에선 배우들이 그네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는 앞자리에 앉아있어서 그런지 배우들이 우리 위까지 날아오는 느낌마저 들었고, 다인이는 매우 환호하고 감격하면서 무대를 지켜보았다.
뮤지컬을 너무너무 감격스럽고 재밌게 본 우리는 인터미션 시간에 기념품을 사러 데스크에 갔다. 티셔츠, 가방, 자석, 컵, 포스터, 책, 액세서리 등이 있었는데, 다인이는 마틸다 티셔츠를 사고 싶어했다. 키즈 사이즈를 물어보니, 솔드아웃이라고 했다. 망설이다가, 성인 S사이즈를 샀는데, 그 사이즈로 사기를 잘한 것 같다. 평소에도 옷을 크게 입는 편인 다인이에게 성인S가 맞는 사이즈였다. 이날 다인이만 기념품을 사줄게 아니라, 나도 프로그램북을 살 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날 우리가 본 마틸다 역 배우가 누군지 아직까지 궁금하다...!
'마틸다'가 마지막 커튼콜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씩 웃는데, 그때 나는 정말로 눈물이 찔끔났다. 생각해보니, 앞선 장면들에서 '마틸다'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장면이 단 한 장면도 없었던 것이다.
이후,
1. 이날의 공연을 너무 흥미롭게 본 우리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마틸다 넘버들을 자주 들으며 추억했다. 다인이는 마틸다의 솔로곡 'naughty'의 악보를 구해 피아노 수업 때 배우고 있다. 다인이 수준에서는 어려운 곡인데도, 노래를 좋아하니 극복하면서 조금씩 배우고 있다.
2. 그리고, 어렵다고 쳐다도 보지 않았던 <마틸다> 소설책을 읽었다. 다인이가 다니고 있는 영어학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프레젠테이션 시간이 있는데, 때마침 주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에 대해 소개하고 이유를 말하는 거였다. 다인이에게, 넌 영어 이름도 마틸다고, 영화도 봤고, 런던에서 뮤지컬도 봤으니,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마틸다'로 소개하는 게 어떻겠냐며, 그러려면 책을 읽어야하지 않겠냐며 슬쩍 찔렀더니, 읽었다. 얼마나 다 이해하고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 보긴 했다. 그리고 나름 발표도 꽉 채워서 훌륭하게 하고 온 것 같다.
3. 한국에 돌아오면서 찾아보니 10월부터 국내 마틸다 뮤지컬 공연도 앞둔 상태였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국어 버전으로도 보자 했는데, 우리는 지난 10월 29일 한국에서도 마틸다 뮤지컬을 봤다. 10월 29일은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남편은 체코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외로운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의 해외 근무로, 결혼기념일을 혼자 보낸 일이 종종 있었어서, 이젠 많이 무뎌진 편이다.) 나는 그냥 내 소울메이트 다인이랑 한국 버전 마틸다 뮤지컬을 보겠다고 했고, 남편은 우리가 가족 여행 코스로 고려했다가 뺀 부다페스트로 그홀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런던 마틸다를 보고, 서울 마틸다를 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런던에서 못알아들었던 부분까지 이해를 쏙쏙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응?) 그 여리고 어린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틸다의 에너지는 런던이고 서울이고 정말 대단했다.
런던에서 산 마틸다 티셔츠 입고 감! ^^ 마틸다 서울 티셔츠도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REVOLTING 후드 밖에 없어서 패쓰...
한국어 버전 또 하나의 재밌는 포인트는 번역이었다. 'naughty'를 어감까지 찰떡으로 '똘끼'라고 번역한 것은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검색해보니 의외로 이 번역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더라. (나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naughty를 한국어 두글자로 똘끼만큼 잘 표현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알파벳을 이용해서 가사를 만든 'School Song'번역도 기가 막혔다. 무대 위 설치된 세트에 알파벳 블록들이 끼어지면서 가사에 맞춰 차례대로 하나씩 불이 켜지는데, 우리말 가사와 알파벳이 이렇게 잘 어우러지다니...! 감탄의 연속이었다.
가사 센스 보소! (런던에서 못산 프로그램북을 서울에서 샀다! 몰랐던 마틸다의 탄생과정과 역사도 적혀있었다.)
구글에서 찾은 School Song Lyrics
이렇게 다인이와 나는 마틸다 덕후가 되었고, 올 겨울 마틸다 뮤지컬 버전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에, 그 작품도 기대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