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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밤 Sep 25. 2023

반품의 늪에 빠지다

누가 저 좀 구해주세요…


음식을 주문할 때 이런 사람이 꼭 있다.


“뭐 먹을래?”

“음.. 아무거나?”


메뉴가 한두 개도 아니고, 정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난감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다. 원하는 걸 얘기 못하고 한참 메뉴판을 정독하다 사람들 시선이 모이면 그제야 입을 뗀다.


“가장 많이 주문하는 걸로…?”




이런 걸 선택장애, 또는 결정장애라고 일컫던가. 문제는 쇼핑을 할 때 이 선택장애가 더 심해진다. 본래 옷에 크게 욕심이 없는 편인데도 쇼핑을 하게 되면 잠재되어 있던 물욕이 마구 샘솟는다. 갑자기 사고 싶은 게 많아지고 …. 보고 또 보고… 온종일 핸드폰을 붙잡게 된다.


방금 전까지도 핸드폰을 뒤적였다. 몇 주 후 친구의 결혼식이 있기 때문이다. 서늘한 바람에 가을이 다가온 것을 눈치채고서야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를 그만둔 이후 정장이나 원피스를 입을 일이 없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입는 옷들은 대부분 티셔츠라는 것을.


혹시나 하여 옷장을 뒤적였다. 한쪽 구석에서 회사 다닐 때 입었던 원피스 몇 벌과 정장바지를 찾았다.


오 마이갓.


원피스가 너무 짧다. 이런 걸 어찌 입었지? 치마를 너무 안 입어서 짧아 보이는 착시효과가 나는 걸까. 서둘러 바지를 입어보았다. 겉으로 볼 때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해져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뺀질거리는 무릎과 엉덩이. 주름위로 번쩍이는 바지를 보며 열심히 일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 아니다. 추억에 잠길 때가 아니다.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정말로 하. 나. 도. 없다.




급한 마음에 쿠*에서 원피스를 주문한다. 옷 스타일이 왠지 내 나이대에 안 어울릴 것 같다. 하지만 성질 급한 날 잠재울 수 있는 건 로켓배송뿐이다. 마침내 도착. 분명 사진은 허리가 넉넉한 원피스였는데 허벅지부터 걸리는 게 영 불안하다. 그러면 그렇지. 뱃살이… 자꾸 원피스를 밀어낸다. 다 입어보기도 전에 탈락. 반품이다.


쿠*에서  찾는 건 무리였나? 그러면 정장바지는 있으니까 블라우스만 사 보기로 한다.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검은색이랑 잘 어울릴 것 같다. 평소 자주 구매하는 쇼핑몰 신상에 마침 베이지색 블라우스가 떴다. 모델이 입은 모습을 보니 내가 원하던 느낌이다. 좋아. 구매.


옷이 도착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택배비닐을 뜯는데 불안감이 엄습한다. 반짝반짝.. 이렇게 빛나는 소재였나…? 일단 입어보자. 반짝거림은 그렇다 치고 내 좁은 어깨 위로 힘없이 늘어지는 블라우스의 나풀거림. 조금 큰 것 같다. 아니, 사실 많이 크다. 그래도… 입을.. 아니야. 그래도 친구 결혼식인데. 얻어 입은듯한 블라우스에 낡은 정장바지는 아니지. 그래 반품이다.


그런데.. 친구 결혼식에 꼭 화려하게 입고 가야 하는 걸까? 어차피 친구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는 자리지 패션 쇼하러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슬랙스에 단정한 니트정도는 있으니 차라리 괜찮은 코트를 입고 가보자. 추석이 지나면 바람도 쌀쌀해질 거다.


블라우스에서 코트로 쇼핑경로를 바꾼 후 열심히 가을코트를 찾기 시작한다. 찾다 보니 결혼식에만 입고 가면 아까우니까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걸 골라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 그래, 이거야. 드디어 트렌치코트 한 벌을 구매한다. 리뷰도 많고 모델 입은 모습도 괜찮다. 이번에는 성공이길.


며칠 후 택배가 도착하고 거울 앞에서 코트를 걸쳐보았다. 음… 분명 면이라고 했는데? 이건 늦가을에나 입게 생겼다. 그리고 키 160인 나에게 너무 크고 길다. 모델에게는 적당해 보였는데 내게는 왜 이렇게 크지? 더구나 결혼식에 입고 가야 하는데 너무 캐주얼하다. 이걸.. 어찌 입고 가나. 반…. 품…..




세 번째 반품신청을 하고 비루한 내 몸뚱이를 거울에

비춰보았다. 옷이 문제인 걸까? 내 몸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내 선택이?


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어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이 택배상자와 뜯긴 비닐들을 보더니 조용히 묻는다.


“또.. 반품??“


뭐라도 대답하고 싶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내 주섬주섬 반품할 옷을 모아 정성껏 포장한다. 사이트에서 반품을 신청하고 숨을 가다듬는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쥔다. 이번에는 스커트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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